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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숙녀 Dec 01. 2021

나는 금수저 말고 글수저입니다


엄마가 가족 다음으로 사랑한 건 책이었다.


어렸을 때. 아빠가 출근하신 집엔 나와 동생, 엄마뿐이었고 그렇게 세 여자만 남은 집을 가장 듬직허니 지킨 건 다름 아닌 엄마의 책장이었다.

 

거실 한 편에 있던 책장은 높기도 높고 넓기도 넓었다. 나와 동생이 미취학 아동인 걸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 집 애들은 둘 다 대학원생인가 봐? 여겼을 수 있을 만큼, 엄마의 책장엔 온갖 책들이 금방이라도 삐져나올 듯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서른여섯인 지금에라도 읽어보자며 사두곤 아직 못 끝낸 '상실의 시대'를 처음 본 것도 그 책장에서였을 만큼, 시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부터 실용서적에 이르기까지 엄마가 사랑그 공간엔 늘 다양한 이야기들이 북적였다.


양구군에서 가장 큰 오일장이 열리는 날.

네 식구 먹을 찬거리를 다 산 엄마는 마지막엔 언제나 서점으로 향했다. 주머니 속 꼬깃한 지폐로 사는 책 한 권이 그녀가 본인을 위해 하는 지출의 전부였고 나는 지금도 그때 엄마의 얼굴생생히 기억한다.


한쪽 겨드랑이에 새로 산 책을 끼고, 양손으론 나와 동생의 손을 잡으며 "이제 집에 가자" 말하는 그 표정은 매주 수요일, 아빠가 퇴근 후 시외버스터미널 옆 마로니에 레스토랑에서 사 오신 돈가스 봉지를 받아 들었을 때의 내 얼굴과 꽤나 닮아있었다. 그래서 알았다. 아, 엄마가 지금 행복한 거구나.


우리 자매가 사이좋게 잠에 들었거나 미미와 주주 인형을 갖고 논다거나 하는 시간에야만 잠깐씩 도둑 독서를 하던 엄마는,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더는 당신의 유일한 취미 활동을 못 하게 됐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책 읽는 게 다인, 소박하다 못해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 그 대수롭지 않은 일을 영영 잃 된 것이다.




그렇게 30여 년. 책을 사랑하던 30대 여자는 이제 책은 고사하고, 대폰 액정의 글자도 돋보기를 쓰고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려야만 읽을 수 있는, 외국 영화는 자막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다 보고도 줄거리를 이해 못 하는 60대 후반이 됐다.

 

달라진 건 시력 만이 아니었다.


내게 당신의 흰 피부를 그대로 물려엄마는 피부만큼이나 손 예뻤는데, 희고 고운 손가락으로 보드라운 책장을 는 모습 어찌나 빛났는지. 어린 큰 딸 아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몇 해를 꼬박 엄마 차지 정도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은 건 늘 그렇듯 과거형. 된 인생과 모진 세월에 그 섬섬옥수는, 소설보다굴곡진 이야기를  가득 품게 됐니. 제는 엄마 삶이 웬만한 책 한 권은 되고도 남을 만큼 많은 게 변했다.




글쟁이 되고 싶다고 노래 불러온 이때껏, 글이란 그저 하늘이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씩 주는 장기 중 내게 준 재주려니 생각했다. 잘하는 것이니 좋아할 수밖에 없고 좋아하다 보니 욕심내게 됐던 것이라고.


헌데 오늘 문득 생각한다. 내 꿈이 '책 쓰는 여자'가 된 건 어쩌면 엄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책과 글을 좋아하는 여자가 낳은 딸이니 내가 책과 글을 좋아하는 건 이미 정해진 일, 운명 같은 것이리라고.


이제껏 단 한 번도 학창 시절의 엄마, 숙녀일 때의 엄마 꿈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무관심이 후회된다. 이 불효를 반성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면 엄마도 나처럼 글 쓰고 싶어 했을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나보다 훨씬 잘 쓸지도 모르겠구나.


요새 일이 너무 고돼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여도 무슨 것이어도 좋으니 글만 쓰게 해달라고 바라던 날들은 까맣게 잊고.


그러다 오늘, 이렇게나 새삼스레 책 읽기를 좋아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아마 식지 말라는 뜻이겠지. 글 글 노래 부르며 마냥 즐겁던 그 단순한 뜨거움을 잊지 말라는 얘기리라.


 덕에 아주 오랜만에 다른 꿈을 가져본다. 투박한 돋보기건 오디오북이건 무엇으로 보셔도 좋으니 엄마 살아 계실 때 내가 써낸,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엄마에게 드리노란.


내게 책과 글을 처음 알려주고 사랑하게 해 준 것이 엄마였으니 내가 쓴 이야기의 첫 독자는 당연히 엄마여야만 한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식으면 안 된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그리고 오늘지 이렇게 또 한 번.

내게 글을 준 엄마에게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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