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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숙녀 Mar 03. 2022

오늘은 이렇게 퇴사를 미뤄봅니다

                                        

대다수 직장인들에게는 회사 내 혼자만 알고 있는 아지트가 있다. 퍽퍽하고 깝깝한 회사생활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는 그런 곳.


사회생활 12년차요 현 직장 7년차인, 그리고 그 7년 동안 집보다는 사무실, 동네보 회사에  많이 있던 커리어우먼(이렇게라도 돼보고 싶어..)인 내게도  사 내 나만의 은밀한 공간이 있다.


면 좋겠... 애석하게도 내겐 그 공간이 없다. 내 편 하나 없는 회사에 무슨 아지트 씩이나? 그런 달콤 발칙한 상상은, 30대 후반에겐 안 그래도 후달리는 체력만 동내는 나이 착오적 발상기에 일찍이 접었음이다.


그도 그럴게 그 야무진 꿈을 꾸기에 내 연차 새파랗게 어고, 업무시간에 농땡이 피울 깡 역시 내겐 부재했으며 같이 담소 나눌 동기 또한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고로 아지트는 언감생. 내게 해당되는 복지란 그저 사측이 공적으로 제공하는 기본적인 몇 개가 전부인 일이었다. 그래, 그런 줄로만 알았.




업무 특성상 순환보직이 아닌 나는 7년째 한 자리를 쓰고 있다. 때마다의 인사발령과 그에 따른 자리 이동으로 회사 전체가 시끌시끌, 난리통일 때에도 내 자리만은 멈춰있는 섬처럼 고요-한 게, 소음도 미동도 없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에선 모자라지만, 그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는 세월을 한 자리에서 보냈다는  건 여러모로 신기한 경험을 가능케 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먼저, 흔히 말하는 '눈 감고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안다'는, '생활의 달인'에 출연해도 될 법한 그 일이 회사 내 자리에서는 가능했다. 것도 착오나 오차 없이 착착착, 탁탁탁!


12시 방향엔 외부망 PC, 2시 방향으론 전화기, 휴지통은 3시 방향, 물티슈는 오른쪽으로 의자 반 바퀴 돌려서 첫 번째 서랍... 등등등. 안 보고도 줄줄 고 눈 감고도 찾을 만큼 모든 것들이 나의 동선에 최적화 되어있는 시스템.


신기한 건 자리가 언제나 깨끗하다는 . 평일에는 출퇴근 흔적들로 전쟁터, 주말에는 삼겹살을 좋아하다 못해  이젠 돼지를 사육하기로 한 건가? 싶을 정도 집과는 다르게 늘 반질반질 차곡차곡.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까? 여자의 깔끔함? 내 공간에 대한 결벽? 애착?에 의한 정리정돈이라고 하기엔... 그럼 집은 왜 그 모양 그 꼴?로 얘기가 전개돼 버릴 것 같아 그건 어렵겠고, 여하튼 이유야 아무래도 좋을 만큼 내 책상은 365일 쾌적함을 자랑했다.


마지막 신기한 포인트는 자리가 곧 나 자체라는 것이었다. 그곳엔 정말이지 나의 모든 게 녹아있었다. 취향부터 관심사, 건강상태까지 나의 모든 게 총망라된 공간. 서랍 속 초콜릿에선 입맛을 가늠할 수 있었고 책상 위 소품에선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취향이 파악됐으며, 곳곳에 놓 안마기에선 얘가 목과 어깨가 안 좋다는 걸 알아차리기 충분했.


그러게, 고 보니 진짜 그렇네...

러니, 그걸 알고 나니 현타가 오네.




입에 풀칠은 해야 하니 꾸역꾸역 어쩔 수 없이 다니고 있다고 여긴 곳. 그리고 거기서 내 자리라 불리는 그 1평 남짓한 공간에 이렇게나 내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을 줄이야.


근데 그러고 보자면 그 공간은  알다가도 모를 곳이었다. 이 공간의 정체성이 헷갈린 적이 수두룩이었으니까.


어떤 날은 내 자리 파티션이 한없이 안락하다가도 별안간 무슨 장벽처럼 느껴져 한없이 외웠고. 나도 모르게 해버린 혼잣말을 옆자리 직원이 듣고 대꾸를 하면 그게 짜증스럽다가,  들어줬으면 싶은 말에 아무도 대꾸를 안 해줄 땐 또 그 무관심이 서운했다. 그래, 사람은 무슨. 여기 다들 일하고 돈 벌자고 온 곳이니 그거면 된다 생각다가도, 절간처럼 사무실이 고요할 땐 그게 왜 그렇게 적막하고 아쉬운지.


책상과 의자, 서랍장 하나와 나 한 명 앉으면 금세  공간에서, 뭐 이리도 많은 일과 감정이 빈번히 오갔는지에 대해 새삼 심오 생각한 결과는 참을 수 없이 시시했다. 그 모든 게 너-무나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하루 1시간도 아니고 최소 9시간, 일주일 최소 52시간(+a) 보는 곳. 그 말은 곧 내 지난 7년 대다수의 희로애락을 이 자리에서 맞을 거란 뜻이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터 얘기였다. 그런데 그런 공간에 나를, 사람을 안 담은 채 일만 두려고 했으니 그게 됐을리가 없지.




내가 지금 하필이면 회사를 두고 오글맞게 감성에 젖은 건 야근 좀 하려고 아직 회사여서인 건 아니고, 사무실에 지금 혼자 남아서 센치해져서인 건 진짜 아니고, 요즘따라 회사 생활이 권태로워서인 건 더더욱 아니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 넓고 비싼 서울 땅에,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채 마련하려고 모두가 아등바등하는 이 시대에. 친절하게 내 이름을 걸어주면서 

응! 여기서 여기까진 네 공간! 24시간, 1년 365일 언제든 환영!이라고 해주는 데가 어을까. 그것도 다달이 돈까지 주면서.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필요로 하는 거까지 모든 게 다 갖춰져 있고? 아니 진짜 뭐야 이거 쓰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일이네?




원래  다 떠나봐야, 잃어봐야 안다고 하지 않던가. 헤어진 그 남자 생각에 아직 가슴 먹먹하고, 서울살이 하면서 고향 얘기 나오면 자랑부터 나오는 거만 봐도 그렇듯,

이 이치라면 회사도 떠난 후에 생각하면 다신 없을 신의 직장이 될 거 아니겠니?


그러니 있을 때 잘해야겠다. 내 자리한테.

이 회사 다닌 지 7년 만에 나만 알고, 나만 쓸 수 있는 찐 아지트를 찾았으니, 어쩔 수 없다 조금 더 다니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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