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숙녀 Sep 01. 2022

사랑은 연필로 쓰라던데 그럼 자기소개서는요?


서른일곱. 살면서 해야 할 자기소개는 웬만큼 클리어했겠거니 여겼다. 경솔했고 오만했다. 서른일곱이래 봤자 백세시대엔 겨우 3분의 1을 넘긴, 이제 갓 신입 티를 벗은 초짜 인생러일 뿐인데 말이다.


그렇다해도 불혹이 코앞이니 이제 또 자기를 소개해야 한다면 여보 자기의 그 자기지 본인인 자기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보란 듯 후자의 자기를 소개해야 할 일과 맞닥뜨렸다. 이거 이쯤 되면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 아니라 자기소개의 연속인 게 아닌 건지... 어질어질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자기소개는 종류별 상황별로 할 만큼 해 온 터. 그런데도 경험치가 쌓이긴커녕 할 때마다 로봇이거나 사시나무가 되기 일쑤니, 생각해보면 신기한 노릇이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이렇게 머리가 쭈뼛서고 오그라드는데 세상 그 수많은 증후군과 공포증들 중에 어떻게 아직까지 자기소개를 앞에 붙인 게 없단 말인가.


래도 아무렴 '나잘알'로는 지구 원탑이어야 할 내가, 날 소개하는 것에 이토록 진땀을 뺄 일인가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게 자기소개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고 안 할 수 있다면 영원히 외면하고 싶은 것. 그럼에도 굳이 꼭 해야 한다면 '아이엠그라운드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노래에 맞춰서만 하고 싶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B.U.T... 더는 그럴 수도 없는 게, 세상이 바뀜에 따라 얘기는 달라졌고 그 끝에 하필이면 자기소개의 위상까지 변했기 때문. 자기소개란 선택이 아닌 필수. 그러니까 삶을 이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의무 비슷하게 돼버린 것이다. 홍보니 광고니 하는 것들도 결국엔 다 '나를, 제품을, 회사를 소개합니다. 알아주세요' 하는 행위이니 바야흐로 지금은 먹고살려면 나를 어필해야 되는 시대. 그리고 나는 그 한복판에서 입에 풀칠하기 위해 끊임없이 플러팅 해야만 하는 그냥 보통의 어느 사람.


정리하자면 이건 지금 예기치 않게도 반드시 최후의 1인이 돼야만 하는 자기소개를 하게 된 절체절명의 상황인 것. 그나마 다행인 건 그게 말 아닌 글이라는 것이겠고 불행인 건 아이엠그라운드 자기소개하기 같은 BGM은 깔리지 않았다는 것쯤 되겠구나.




자기소개서를 마지막으로 쓴 건 3년 전. 외적으로는 이직을 위한 글쓰기였지만, 내적으로는 내 업무와 직종의 특성상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쓴 글이었으니, 딱히 어려울 게 없었다. 붙어야만 한다는 부담과 강박이 빠졌기 때문.


아이에게 종이와 펜을 쥐어주면 보통은 낙서라고 일컬어지는, 주제와 정체 모를 그림을 마구잡이로 그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나는 글자를 썼다(고 했다). 그게 문자의 형상을 갖추기나 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리는 대신 쓰는 쪽이었고, 그런 아이에게 붙어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이 더해지지 않은 자기소개서 쓰기란? 면접관이라는 최소 3인의 독자를 확보해 놓은 신나는 글쓰기 한마당일 뿐.


그렇게 한마당 잔치를 치르는 느낌으로 인생 후반부만을 새로이 덧쓴 자기소개서를 본, 당시의 면접관은 말했다. "근데 자기소개서를 진짜 잘 썼네요?" 그리고 난 그 채용전형에 최종 합격하였으니, 나의 자기소개서는 내 합격에 '또 한 번' 기여한,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우쭈쭈 장한 내 새끼쯤 되는, 귀한 창작물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응? 3년 새 뭔 일이 있던 거지? 어딜 가나 예쁨 받던 그 자기소개서는 어디 가고 이런 게 있는 것인가. 문장은 이상했고 내용은 지루했다. 촌티가 풀풀. 내가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졸업앨범을 꺼냈던가?


이건 뭐 자기소개서에도 전성기가 있는 것처럼, 인생 총량의 법칙처럼, 자기소개서도 총량이 있는 듯한 느낌. 이번에도 너만 믿는다며 3년 만에 꺼내본 자기소개서는 내게 "모아야 지난 세월, 너 원하는 곳에 넣어줄 만큼 넣어줬잖어. 내 할 도리는 다 한 거 같아. 난 여기까지야"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누가 자기소개서 아니랄까 봐 팩트만 말하는 것 좀 보소.


충분히 그럴만했다. 사회 초년생 때 써놓은 걸 뒷부분만 새로 써서는 재탕 삼탕... 우려먹고 날로 먹으며 이뤄낸 네 번의 이직 아니었는가.


내 나이 서른일곱. 모름지기 반성하기 좋은 나이. 아울러 자기소개서 쓰기 딱 좋은 나이... 그렇다면?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지 않고 있는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자기소개서 써라.

세상에 너를 처음 알리는 것처럼.


그렇게, 인생 첫 자기소개서인 척하는, 반드시 붙어야만 하는 부담과 강박으로 점철된 서른일곱의 자기소개서 쓰기 시작되었다.


나는 정녕, 완성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합격할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날 갑자기 노화가 노크를 해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