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니는 길목으론 꽃나무가 한 그루도 없던 거야? 등등등... 갖가지 충격으로 머리가 띵.
본의도 아니고 때도 아니게 어제와 그제, 그 끄저께를 복기하느라 열을 내는데, 사정 없이 분주한 머리와 달리 마음은평온했다.
내가 별안간 마주한 것이불청객은 아니지만
분명 이 상황은 갑분꽃. 내게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없던 꽃이 하루아침에 핀, 좀처럼 이해 못 할 상황임에도 내 마음은 눈앞 비주얼에 당황스럽기보단 몽글몽글하니, 신기한 일이었다.
'갑자기'란 보통, 아무리 반가운 것이더라도 예상 못했다는 당혹스러움에, 필연적으로 피로가 수반되기 마련인데. 이 상황에선하루살이 눈곱만큼도 그런 감정이 없으니 어찌 안 신기하겠는가.
허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를 바로 수긍하게 되고 마는, 너무나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
얘는 꽃이었다.것도 봄꽃. 심지어? 벚꽃.
세상에 꽃을, 그것도 벚꽃을 피로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꽃이 업인 화훼단지 상인, 플로리스트, 지자체의 꽃 축제 담당자 같은 분들이야 물론 이따금 피곤하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고단하시다가도 이내 그 자태에 색감에 향에,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들이 준비한 꽃에 마냥 행복해하는 사람들 모습에 피로고 고단함이고 한 순간 스르르, 줏대 없이 녹아내리고 말지 않을까 하는, 꽤나 합리적 의심이 드는 바.
꽃과 인간과 피로라. 인간이 꽃 때문에 피로해한다기보단 꽃이 인간으로 인해 피곤하다고 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연결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어제 퇴근길의 잔상이 길다.
언제 이만큼 먹었는지도 모르게 서른아홉 돼서는 1월 지나 2월 가고, 그 이름도 찬란한 '춘'삼월까지 꽉꽉 채워 보냈더니,다음 챕터는 무려 계절의 여왕님인 상황. 당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봄이 온 것을.
그러니 대충 이 언제쯤 꽃도 피겠거니 으레 여겨왔다지만 맙소사, 나의 무심결을 이렇게 별안간 활짝 핀 채로 덮칠 줄이야.
그런데 거참 어찌나 홀연한지, 겨울바람 입은 공기 속에서 기척도 없이 어느새 펴서는 금세 또 갈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오늘, 바람에 제 한 몸 아낌없이 맡기며 휘날리는 걸 보니 길어야 일주일, 짧으면 이번 주말이겠네 싶다.내 속도 모르고. 나도 무심했지만 너도 무심하구나.
이렇게 갑작스레 펴놓고도 참 새삼스레예쁜데, 내년엔또 얼마나 귀하려나. 다음 해면 내 나이가 무려 어떤 유혹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그 춘추니, 내년엔 이 꽃들에게마저 덜 매혹당하려나? 싶기도 하지만 글쎄. 그 꼿꼿한 나이도 봄꽃 앞에선 꿈쩍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껏 내가 봐 온 바로는, 꽃 앞엔 아이들보다 어른, 어른보단 어르신들이 더 줄지으셨고 약해지셨으니까.
예전엔 이유를 몰랐다. 대다수의 어른들이 왜 꽃만 보면 사진을 찍는지. 이해도 안 갔다. 대다수의 여자들이 꽃 선물에 왜 그리도 환희하는지.
지금도그 이유를 완전히 알거나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아니다. 다만 한 가지, 좀처럼 영문을 모르겠고 도통 공감 안 가던그 모습들에 내가 한 발짝 가까이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그리고꽃과 나의 좁혀진이 거리는내가 나이 들어감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함께.
아기가 예뻐지고 아이들이 좋아지면 결혼할 때가 된 거라는 말처럼, 꽃에 설레고 꽃을 어떻게든 담아놓고 싶다는 건 내가,여지껏 보고 커 온 어르신들처럼, 인생 희로애락에 발 한 번 씩은 들여놔 본 진짜 어른이되어가는 중이란 신호이리라.
나이 들수록 작은 건 큰 게 되고 아무것도 아닌 건 아무게 되고. 전보다 더 가지게 됐지만 손에 쥔 건 없고, 옛날보다 많이 채운 거 같은데 더 많이 외롭고... 해지는 것처럼꽃도 말이다. 같은 꽃인데 재작년 꽃, 작년 꽃, 올해 꽃이 다르다.
꽃이 꽃이지 하던 게 예뻐보이더니 계속 보고 싶어지고, 누가 꺾으면 썽나고 지는 걸 보노라면 슬프고 또 필 걸 아는데도 휑하다. 꼭 인생 같아.
짧게 피어줘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 있으면 뜨거운 볕, 억센 바람, 날카로운 빗줄기에 거친 모랫가루에, 매캐한 매연에 야들야들 연약한 잎 다 상해서 세상 흉한 꼴 온몸으로 겪고 시드는 일 밖에 없을 테니. 짧고 굵게 제일 좋은 볕, 푸른 하늘, 사람들 환호, 초롱한 눈빛만 듬뿍 머금고 홀연히, 예쁘게 져주어서 고맙다고.
꽃이 인생이라면 반대로 나는 꽃일 수도 있겠지. 행성마다 시대마다 다르나, 지금 세상을 기준으론 보통 한 번 피면 100년 정도 만개했다가 지는 인간이라 불리는 꽃.
그래 그런 거라 치고. 그렇다면 나는 내게 남은 봄날. 더 만개해야겠다는 생각에 머문다.
남은 날들에 바람 불면 그 결따라 잘 나부끼고, 비가 몰아치면 이때를놓치지 말고 갈증 해소! 이따금 볕이 좋을 땐 잘 즐기고 기억하면서, 제법 꽃다운 사람으로 피어날 것.
왜 우스갯소리로 한 번씩은 다 해 본 그 말.꽃이랑 사진 찍으면 뭐가 꽃이고 사람인지
분간 안 되는 바로 그 느낌 살려서 말이다.
자, 꽃들아 메모하렴.
내년 이맘땐 내가 너희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너희가 날 구경하려고 피게 될 거야.
주객전도, 전세역전이랄까?
이 말도 안 되는 걸 동기부여 삼아, 난 지금보단 쬐금 열심히 살아볼게. 나약하고 나태한 이 인간의 핑계가 좀 돼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