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인(夢人)
내가 그 스웨터를 처음 본 것은 한 달에 한번 열리는 우리 아파트 벼룩시장에서였다. 하얀 모시옷을 입은 할머니가 신문지에 스웨터 하나만 올려놓고 일일장터에 앉아계셨다. 하늘색 바탕에 새털구름이 솜처럼 하얗게 새겨져 있는 게 너무 예뻐 보여 “할머니, 이 스웨터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나를 올려다보며 “파는 거 아닐세.”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때 갑자기 검붉은 비구름이 몰려와 나는 비가 내릴까 봐 아파트 쪽으로 걸어갔다. 살짝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없고 젊은 여인이 스웨터를 입고 스산한 목소리로 "어딜 혼자 가려고!" 하며 내 손목을 그러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을 닦아내고 출근을 위하여 버스를 탔다. 내 앞에 앉은 여자가 입은 스웨터가 어디서 본 듯하여 기억을 더듬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꿈속의 그녀였다. 새롭게 발령이 난 사무실로 가기 위하여 버스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하는 마음에 천천히 걸어가는 데 그녀가 뒤에 바짝 따라오는 게 느껴진다. 내가 힐끔 한번 뒤를 돌아보니 기척이 없다. 하루 종일 업무에 바빠 정신없이 보내다가 잠시 짬이 나서 좋아하는 믹스커피를 들고 복도 계단으로 간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창밖 풍경을 보다 옆 건물에 구름 스웨터를 입은 여인이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였다. 나는 순간 종이컵을 놓칠 뻔했다. 흘러내린 커피를 손에서 닦아내고 다시 쳐다보는 순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퇴근길에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오른 후 사람들이 많아 이리저리 치이다 선 자리 앞에 익숙한 구름 스웨터를 입고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를 훔쳐보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다. 나는 먼저 내렸지만 그녀도 내리는 기색이었다. 혹시나 하여 뒤돌아 봤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갔다 오는 길 맞은편 아파트 베란다에 구름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창밖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하얀색 블라인드를 내린다.
매일 버스에서 보던 그녀가 요 며칠 보이지 않는다. 나는 마치 무엇인가에 중독된 사람처럼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리지만 보이지 않는다. 사무실 발코니에서 맞은편 건물을 보아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내 몸은 최면에 걸린 듯 맞은편 건물로 가서 그녀가 서 있던 사무실로 향한다. 사무실의 직원들에게 그녀의 인상착의를 대충 말해주고 최근 안 보이는 이유를 물으니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그런 사람은 근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퇴근해서 그녀가 보이던 301호가 있는 동에 가서 경비원에게 301호에 블라인드가 계속 쳐 있고 전에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니 경비원은 위아래로 나를 보며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 301호엔 사람이 살 지 않는다고 말한다. 301호엔 할머니 혼자 살다가 한 달 전쯤 고독사 했다는 것이다. 유일한 상속인인 사촌 여동생이 집을 내놨는데 소문이 나서 그런 지 잘 안 팔린다고 자기에게 몇 번 하소연을 했다는 소리도 하였다. 나는 경비원에게 집에 관심이 있다고 하며 사촌 여동생의 연락처를 물어 사촌 여동생에게 만나자고 하였다. 사촌 여동생을 만나 집을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하고 그녀와 함께 301호에 들어갔다. 사람의 온기가 없는 집은 휑하기만 하였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베란다 쪽으로 가보았다. 거기에서 보았다. 구름 스웨터.
사촌 여동생이 전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그녀는 가난한 대학생을 사랑했는데 3남 4녀의 장남인 그 남자의 집안이 너무 못살아 아버지가 많이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에 남자는 군대를 빨리 갔다 와서 고시 합격을 한 후 당당하게 그녀에게 프러포즈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입대를 하였다. 입대 전날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 구름 스웨터였다. 그녀는 그 옷을 좋아해서 항상 입고 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남자가 총기사고로 군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그녀는 아버지의 강권에 여러 군데 선을 보았지만 그 남자를 잊지 못해 평생 혼자 살다가 자신도 고독사 했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사촌 여동생은 남자의 집안 허가를 받아 남자가 묻혀 있는 수목장 묘지 소나무 밑에 화장한 그녀의 유골을 뿌려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스웨터가 어떻게 베란다에 놓여 있는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그때 바람이 불며 베란다 한 편의 미닫이문이 삐그덕 열렸다.
사촌 여동생은 나이가 들어 다리가 불편하다고 말하였다. 나는 사촌 여동생에게 허락을 받아 구름 스웨터를 태운 재를 그 남자의 수목장지에 뿌려주기로 했다. 포천에 있는 수목장 소나무 밑에 재를 뿌려주고 정종 한잔과 그녀가 생전에 좋아했다는 뜨거운 믹스커피를 한 잔 올린 후 그와 그녀가 이승에서 맺지 못한 인연 저승에서 만나 행복하기를 빌고 또 빌어 주었다. 수목장지에서 내려와 차를 타기 전 소나무가 있는 쪽을 쳐다보니 새털구름이 솜털같이 하얀 그녀의 얼굴처럼 파란 하늘 위에 두둥실 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