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월요일 아침 9시 연수가 시작되었다. 재산제세 전문가 과정 내가 수료해야 할 연수과정이었다. 이 과정을 수료할 즈음 나의 의무교육시간이 채워지면 아마 사무관 승진이 되어 있을 예정이었다. 나는 사무관 승진을 위한 최소 교육시간 충족을 위하여 연수를 신청하였고 인사계 승인을 통하여 제주도로 오게 된 것이다.
팀별 사례발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나오는 데 아는 얼굴이 반가운 인사를 한다. 예전에 성수 세무서에서 같이 근무한 채우석 반장이었다.
“형님 연수 오셨어요? 나도 교육 왔는 데 오늘 저녁 식사 어때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소주 한잔 하시죠.”하며 반가워한다.
“그래 오늘은 나도 약속이 없으니 내 차로 서귀포시내로 나가 회나 먹고 오지.”나도 대답을 하여 자연스럽게 저녁 약속이 잡혔다.
5시 연수가 끝나고 5시 반쯤 만난 우리는 내 차를 타고 서귀포 올레시장으로 갔다. 우정 횟집이라는 횟집에서 우리는 문어숙회와 고등어회를 먹으며 소주 한잔을 하였다.
“형님은 인생이 술술 풀리시는 것 같아요. 성수 세무서에서 팀장 승진하시고 몇 년 안 됐는데 이번에 사무관 승진 예정이라면서요. 나는 아직 반장 딱지도 못 뗐는데...”
“그러게. 내가 운이 좋은 가봐. 채반장도 이번에 팀장 승진해야지.”내가 위로하자,
“그래야 되는데 힘드네요. 저번 감사에서 업무처리가 잘못되는 바람에 징계를 먹어서...”
나는 약간 불편한 맘이 들어서 위로를 한다는 게 오히려 역효과가 나자 분위기를 바꾸기 위하여 채반장이 유난히 귀여워하던 늦둥이 아들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그래. 어떻게 잘 되겠지. 아들내미는 잘 크지?”
“이번에 심장 수술하게 됐어요. 어릴 때부터 골골했는데... 그래서 전 연수 포기하고 내일 서울로 올라가려고요.”
연이은 그의 불행이 내 탓이나 되는 듯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 불편한 지 채반장은,
“저는 짐을 싸야 해서 빨리 들어갈 테니 형님은 바다 구경도 하시고 좀 더 있다가 오세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의 눈에 촉촉한 기운이 있어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택시를 태워 보내며 담에 만나자고 하였다. 기분이 다운된 나도 오래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횟집 사장을 통하여 렌터카를 운전해 줄 대리기사를 불렀다. 10분 정도 후에 대리기사가 왔다. 단발머리를 하고 검은색 잠바에 진청색 바지를 입은 그녀였다.
그녀는 스포티지에 탄 후 나에게 차키를 달라고 했다. 차키를 주며 나는 호텔이 아닌 법환포구에 가자고 하였다. 잠시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다.
“대리비는 시간만큼 더 드릴 테니 가능하시겠죠?”라는 나의 말에
“그럼요. 관광가이드도 부업으로 같이 하는데 가고 싶은 데 있으면 언제라도 불러주세요. 제가 제주도가 고향이라 좋은 데 많이 알거든요.”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법환포구에 도착한 나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술기운을 몰아내었다. 아직 춥지는 않았지만 여름을 지난 서귀포의 저녁은 바람 때문에 서늘한 기운이 있었다. 계속 밖에 있기가 미안해서 난 근처 카페에 들어가 차나 한잔하려는 생각에 그녀에게 물어보니
“대리비만 시간만큼 주시면 가능하지요.”하며 그녀가 승낙했다.
“오케이, 그럼 오늘 저녁은 제 차만 대리해주시는 거예요.”나는 뜻밖에 선선히 승낙해주는 그녀를 보며 자신감이 들어 웃으며 말했다.
제스토리라는 카페는 당근주스와 케이크가 전문이라고 해서 난 당근주스와 당근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니 그녀는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 해서 같이 주문하였다.
그녀는 35살로 작년에 제주도에 왔다고 했다. 아니 돌아왔다고. 제주도 출생인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 국문학과를 다녔는데 졸업하고 논술학원강사를 했다고 한다. 학원강사를 하며 본인이 쓴 시, 소설로 신춘문예에 계속 응모하였지만 낙선하여 작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학창 시절부터 캠퍼스 커플로 지내던 남자 친구는 행정고시에 패스했지만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든든한 처가가 필요하다며 그녀와 헤어지고 서울의 모신문 사회부 기자와 결혼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 서울에서의 생활이 그리 녹녹하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짙은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아저씨는 뭐 하시는 분이에요. 내 이야기를 들었으니 아저씨 이야기도 해주세요.”
내가 나이가 50이 넘었다고 하니 그녀는 나를 대놓고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나도 그 호칭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그녀가 나를 선생님, 고객님이라고 불러 주지 않은 것에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나는 내가 공무원이고 사무관 승진을 앞두고 서울에서 연수를 왔다고 비교적 소상하게 나의 사정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아내와는 별거 중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순간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나도 의아해졌지만 그녀와의 관계를 여기에서 끝내고 싶지 않은 나의 불순한 의도가 그녀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며 창밖의 포구 풍경을 바라보았다. 포구 끝 등대에 파도가 부딪쳐 생긴 하얀 포말이 바다낚시꾼들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