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오는 곳(5) - 단편소설

by 하기

5.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얼핏 잠이 든 나는 연수 일정 때문에 맞춰 놓은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다행히 그날 강의는 내가 발표하는 일정이 없어서 다른 직원들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동안 나는 피곤한 몸을 의자에 걸치고 살짝 잠이 들었다. 쉬는 시간에 졸음을 쫓으려고 커피를 마시는 데 얼굴이 익숙한 대학교 후배가 말을 건다.


“선배님 연수 오셨어요. 저도 법인세 교육받으러 왔는데 반가워요. 그리고 선배님 한턱 쏘셔야겠는데요. 오늘 사무관 승진 내정자 명단을 카톡으로 받아봤는데 선배님 이름이 있더라고요. 축하드립니다.”


후배가 보여주는 카톡 메시지를 보고 나는 나의 휴대폰으로 전달을 부탁했다. 전달된 메시지를 아내에게 보내주자 아내는 축하한다며 답문을 보내왔다. 그리고 장인어른에게 전화가 왔다.


“축하하네. 이번에 차 바꿀 때 됐지. 내가 중형차 하나 뽑아 줄 테니 타고 다니게. 과장님이 소형차 타면 체면이 안 서지 않나. 그리고 사무관이 됐으니 조만간 세무사 자격증이 나올 텐데 사업계획이 서면 나한테 말하게나. 내가 가입한 펀드가 이제 만기가 되니 3억 원 정도는 투자가 가능할 거야.”하며 나의 승진을 축하하여 주었다.


나는 너무 과한 선물이라고 세무사 개업도 내 힘으로 해보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였지만 아내가 받을 상속분을 미리 정리하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라는 장인어른의 말에 더 이상 이유를 달지는 않았다. 후배에게 사무관 승진턱으로 서귀포항으로 가서 전복뚝배기와 붕장어 물회로 점심을 사 주고 나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가 없어서 제가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 오늘 연수는 끝나셨죠?”


“응, 오늘 사무관 승진 발표가 있었어. 그래서 여기저기 축하받느라고...”


“정말요, 축하드려요. 그럼 축하선물로 뭐 받고 싶은 거 없으세요?”


“아니, 너 자체가 나에겐 선물이지. 이따 만날까?”


“여기 도서관이에요. 연수원 근처에 있는 삼매봉도서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미술관 가요. 제가 아는 분이 전시회를 해서 초대받았어요.”


차를 몰고 도서관에 가니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 하늘색 스키니진과 하얀색 니트를 입고 책을 읽고 있는 그녀를 보니 학창 시절에 캠퍼스 커플이었던 여자 동기가 생각이 났다. 우리는 항상 같이 밥을 먹고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를 했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몇 번 더 응시했지만 통과를 하지 못하여 하위직 공무원 시험을 통하여 국세청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대기업에 취업하여 내가 공무원에 입사 당시 그녀는 내 월급의 2배 이상을 이미 받고 있었다.


자격지심으로 학창 시절과는 달리 소극적이 되어 가던 나를 그녀는 답답해하더니 결국 회사동기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여 내 곁을 떠나가 버렸다. 그녀와의 이별은 아내를 소개로 만나기 전까지 내 청춘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우리는 도서관 근처의 기당미술관으로 함께 갔다. 미술관에서는 제주도 출신 화가의 풍경화 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녀의 중고등학교 동창으로 제주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평생 제주도에 살았다는 화가는 나이에 비해 노회한 느낌이었다. 말과 바람, 한라산 등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은 이수근의 토착적인 풍경과 이중섭의 거친 붓터치가 혼합된 느낌의 풍경화들이었다.


우리는 전시회를 관람하고 같이 식사를 하였다. 연수원 근처의 식당에서 구운 족발과 한라산 소주를 한잔씩 하였다. 부대찌개가 서비스로 나와 우리는 금방 배가 찼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떤 사이예요.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 아니면 제주도에서 만나셨나요?”화가가 그녀와 나를 번갈아 보며 물어보았다.


“이분은 나의 키다리 아저씨야. 연인이기도 하고... 또 능력 있는 공무원이시지.”나를 보고 웃으며 그녀가 말하였다


“아실지 모르지만 사랑에 한번 상처가 있는 친구예요. 나도 한 때 여자로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예술의 길을 동행하는 동지로 지내고 있죠. 내 친구가 사랑 때문에 또다시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화가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하였다.


“그럼요. 저도 사랑에 상처를 받았죠. 한때...”학창 시절 그녀를 떠올리며 항상 긴 생머리를 했던 그녀가 지금 내 앞에 머리를 깎고 단발머리를 하고 앉아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나는 과음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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