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의 탄생, 정태춘 떠나가는 배

노래하는 서정시인, 촛불을 들고 거리의 투사가 되다

by 하기

노래하는 서정시인, 촛불을 들고 거리의 투사가 되다

명곡의 탄생, 정태춘 떠나가는 배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없이 꾸밈없이 홀로 떠나가는 배
바람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바람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정태춘은 1978년 '시인의 마을'로 데뷔한다. 같은 앨범에 실린 '촛불'과 함께 시인의 마을은 서정적인 가사와 시를 읊조리는 듯한 독특한 창법으로 대중들에게 강하게 어필한다. 그 결과 197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대중가요계에 안착하게 된다. 주목받는 가수로 서라벌 레코드와 계약을 하고 2집을 준비하는 그에게 새로운 운명이 찾아온다.


부산에서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박은옥이 최백호의 추천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 계약을 위하여 상경한 것이다. 사장실에서 오디션을 보던 사장은 정태춘을 불러 그녀의 음색과 그의 곡이 맞을 것 같다고 협업을 제안한다. 부산에서 촛불과 시인의 마을을 듣고 그의 음악에 매료되었던 그녀와 그녀의 목소리와 기타 연주 실력에 반했던 그들은 오래지 않아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결혼을 한다. 음악적 동지에서 영혼의 친구로 평생 가약을 맺은 것이다. 이후 그의 음악활동은 박은옥과 함께 진행된다. 솔로 가수로의 활동도 같이 하며 '사랑하는 이에게'와 같은 세레나데로 연인과 부부들에게 영원한 듀엣가수로 각인되게 된다.


2집과 3집의 부진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의 전속계약이 파기되고 그에게 손을 내민 곳이 지구레코드였다. 4집은 그에게 재기의 날개를 달아준다. 그의 대표곡이 된 '떠나가는 배'. 나는 지금은 없어진 덕수궁 옆 세실극장에서 그와 박은옥의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직접 들은 추억이 있다. 그때만 해도 40대였던 그는 흰머리 하나 없이 정정하고 활력적인 모습으로 노래를 했었다. 최근 데뷔 40주년 공연에서 반백의 머리로 이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세월의 흐름을 느끼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만큼 나도 늙었겠지.


5집 '북한강에서'도 연이어 히트하고 콘서트와 방송 출연으로 안정적인 가수 활동을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그가 돌연 변화를 시도한다. 방송에 출연하지 않고 노동시위, 대학축제, 정치집회 등에서 대중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모습이 자주 나의 눈에 들어왔다. 서정적인 음유시인이 민중가요를 부르는 거리의 투사가 된 것이다. 그의 이런 변화는 사실 데뷔 시절부터 준비된 것이기도 하였다.


시인의 마을이 가요 사전심의 등으로 많은 부분이 개사되어 발매되고 방송 출연을 위하여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내키지 않는 애드리브를 강요받아 이를 거부하자 방송 출연이 힘들어지는 등 기성 권력과 시대로부터 불이익을 받던 시절, 신인이라는 이유로 모욕감을 참아가며 가수 활동을 이어가지만 계속적인 관행처럼 이어지는 가요 사전심의의 부당성을 온몸으로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시대와 민중의 아픔을 함께 하는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노래패에서 민중가요를 부르던 가수들이 이름을 알리고 기성 가요계로 편입하여 안정적인 활동을 하는 것과는 반대로 잘나가는 중견가수가 안정적인 기성 가요계를 뿌리치고 거친 황야의 투사가 되어가는 과정은 그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고 그만큼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그에게 기울이게도 하였다.


'아! 대한민국'이라는 앨범을 사전심의 없이 내고 이어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낸 후 구속된 그. 위헌제청으로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다. 가수 활동 내내 그를 괴롭혔던 사전심의의 굴레를 그 스스로 끊어내고 후배 가수들에게 더 좋은 창작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오늘날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하는 가요계가 그에게 보이는 존경과 헌정은 이런 그의 투쟁과 헌신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 후로도 방송활동보다는 거리에서 더 많은 공연을 하고 민중과 시대의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2000년 대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경제상황의 변화로 그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창작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사진과 가죽공예, 붓글 등으로 취미활동을 하고 간간히 콘서트를 통하여 대중과 소통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은 것은 그동안 이루어낸 업적만으로도 대중들은 그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근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를 성공리에 마치고 다큐멘터리 영화 '아치의 노래'까지 상영하였다. 50인의 작가가 그의 가요인생을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 그에게 헌정하였고 40주년을 기념하는 후배들의 헌정공연도 연이어 이루어지고 있다. 편하게 갈 수 있는 스타로서의 길을 마다하고 시대의 아픔과 민중의 애환을 같이 하며 가시밭길을 뚜벅뚜벅 묵묵히 걸어갔던 그의 인생 말년은 팬들과 후배들의 사랑과 존경으로 이루어진 꽃길이 되길 기원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lV1trrRTXB0


https://www.youtube.com/watch?v=UoyCnQMVAcE


https://www.youtube.com/watch?v=FbpbdhKI7uk


https://www.youtube.com/watch?v=x2qxYlSEHbI




노래하는 서정시인, 촛불을 들고 거리의 투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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