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침이 고인다.
알람이 울린다. 어둠 속, 다급하게 깜박이는 휴대 전화 불빛은 그녀가 하루를 시작하는 데 꼭 필요한 경보와 같다. 아침마다 그 작은 재난을 향해 손을 뻗는 그녀의 모습은, 한밤중 폭우를 만나 해변으로 쓸려 온 이방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가 머리맡을 더듬어 불빛을 움켜쥔다. 손가락 사이로 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그녀는 휴대 전화를 쥔 채 죽은 듯 엎드려 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면, 이제 막 출동하려 한 손을 들고 있는 슈퍼맨과 같다 말할지 모른다.(침이 고인다 중에서)
김애란의 방이 돌아왔다. '노크하지 않는 집'의 쪽방촌과 '바깥은 여름'의 고시원을 지나 원룸으로 진화해서 돌아온 것이다. 쪽방촌에서 반만 문을 열고 서로의 전체가 아닌 반만 노출한 채 학교를 다니던 대학생은 취업을 위해 고시원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새벽에 일어나 유명 강사의 수업을 등록하기 위해 줄을 섰다. 번번이 떨어지고 임용고시를 포기하고 대입학원 논술교사로 취직하여 원룸에 월세를 내며 생활하고 있다.
그녀는 매달 13평형 원룸의 월세와 의료보험, 적립식 펀드 한 개와 적금을 부어갈 만한 생활력을 갖고 있다. 아울러 만기일까지 적금을 붓기 위해선, 오늘 하루, 열심히 얼룩말처럼 달리고, 곰처럼 춤춰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가끔 인생의 어떤 부분을 가불 받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없지 않지만, 한 1년 묵묵히 공부한 뒤 공기업에 취직하는 후배들을 보며 질투가 날 때도 있지만, 경제적 독립이 주는 떳떳함과 함께 술자리에서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지인들의 경조사에서 사람 노릇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녀가 학원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울러 '그만둘까'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월급날은 번번이 용서를 비는 애인처럼 돌아왔다.(침이 고인다 중에서)
하루하루 월세를 내기 위하여 얼룩말처럼 뛰고 곰처럼 춤춰야 하는 노예의 삶. 그 속에서 안온한 주말의 여가를 즐기며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던 그녀에게 누군가의 영혼이 노크를 한다. 그 방에 내가 들어갈 공간이 있냐고. 당신의 마음속에 타인을 위한 배려의 틈이 남아 있는지.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결정적 한방의 멘트가 들어온다. 더 이상 후배를 거부할 수 없는 그녀. 그들의 불편한 동거는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침이 고인다 중에서)
학원에서 논술평가 아르바이트를 맡기며 후배의 경제적 독립을 돕지만 후배는 잦은 실수로 그 일마저 계속할 수 없게 된다.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녀에게 의지하려 하는 후배가 부담스러워진 그녀. 생리로 인하여 침대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같은 여성으로서 모욕감을 주고 자연스레 이별을 예고한다. 눈치를 챈 후배가 짐을 싸서 나가버리고 그녀는 오랜만에 혼자가 되어 다시 자기만의 세계를 즐기려 한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껌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세상에.' 그녀가 놀란 듯 중얼거린다. "아직 달다." 그녀는 천천히 껌 조각을 씹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눕는다. 입안 가득 달콤 쌉싸름한 인삼껌의 맛이 침과 함께 괴었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괸다. 그녀는 웅크린 채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단물이 빠질 때까지 드라마의 '전송 완료'를 기다린다. 어스름한 모니터 불빛 때문인지 쌉싸래한 인삼 맛 때문인지 껌 씹는 그녀의 표정은 울상인 듯 그렇지 않은 듯 퍽 기괴해 보인다. 아직 알람이 울리지 않고, 울릴 리 없는, 깊고 깊은 밤이다.(침이 고인다 중에서)
김애란 작가는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 노크하지 않는 집으로 교보문고가 주최하는 대산대학 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를 졸업하고 취직과 문학의 길에서 갈등하던 시절 마감이 임박해 직접 교보문고 빌딩을 방문해 작품을 제출하고 돌아가는 길 왠지 모를 서러움에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눈물이 약이 되었는지 등단 이후 그녀는 문단으로부터 빠른 소환을 받고 취직 걱정 없이 작가의 길에 매진하게 된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등의 작품으로 이효석문학상, 젊은 작가 대상,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국내 문학계를 석권하더니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은 강동원, 송혜교 주연의 영화로도 히트하였다.
쪽방에서 고시원으로, 고시원에서 원룸으로, 원룸에서 다시 그녀의 방이 어디로 갈지 궁금해진다. 소설이 팔리지 않아 소설가들의 삶이 점점 쪼그라들고 있는 시대. 그래도 좋은 소설은 잘 팔린다는 명제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김애란 소설가의 미래의 방이 대저택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