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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바벨탑 그곳에 사는 사람들

배명훈 타워, 엘리베이터 기동연습

by 하기

타워는 674층으로 이루어진 도심 빌딩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연작소설이다. 그중 엘리베이터 기동연습이라는 작품은 수평주의와 수직주의로 대립하는 계층과 조직의 갈등을 보여주는 우화이다. 미래 빌딩 국가의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SF 적이지만 현대 한국의 현실이 그대로 투영된 듯한 메타포는 독자들이 이 소설의 재발간을 출판사에 요청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작품이 주는 현실적 울림이 만만치 않다.


그런 것도 잘 모르면서 요즘 애들은 수직주의는 무조건 부자들 이념이고 수평주의는 무조건 가난한 사람들 이념인 줄 알아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거든. 사람 사는 게 어디 수직이나 수평 하나만 가지고 해결이 되냔 말이야. 한쪽에서 엘리베이터로 실어 올리면 누가 가서 그걸 목적지까지 옮겨줘야 제대로 배달이 되지.
내일이 딱 그래. 비상시에 육군 병력 재배치하는 계획 하나만 봐도 말이야. 편의상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이라고 부르기는 해도 그게 어디 엘리베이터만 가지고 될 일이냔 말이지. 22층 국경에 집중되어 있는 병력을 670층까지 실어 올리는 동시에 그 병력을 전투 상황에 맞게 배치하려면 수직 이동 속도 못지않게 수평 행군 속도도 중요하거든. 그 둘을 적절히 배합해야 병력 배치가 완성되는 거야.
소설 본문 중에서


부모를 잘 만나 걱정 없이 살던 주인공은 부모의 몰락과 사망으로 하급 계급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다. 부모가 물려준 유일한 부동산인 고시원 원룸에서 재기를 위하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난방비가 없어 얼어 죽을 뻔한 추운 겨울날 옆집에 이사 온 여성이 빵빵하게 틀어주는 난방 때문에 위기를 벗어나는 주인공. 따뜻한 온기의 주인공이 옆집의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묘한 연정을 품게 된다. 겨울을 이겨내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만 삶은 또 한 번 그에게 시련을 선사한다. 눈치 없고 욕심 없는 성격 탓으로 일 많고 힘든 부서에만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무계획실이라는 데를 만들었다니까. 말하자면 응급실 같은 데였지. 스물세 개나 되는 동원 계획을 가지고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사전 계획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몇 시간안에 새 동원 계획을 뚝딱 만들어내야 하는 무시무시한 부서였어.
그런데 나는 또 거기로 차출이 됐지 뭐야. 청렴해 보였나 봐. 그때가 벌써 내가 3년 차였으니까, 뒷 돈 챙기는 법도 좀 배우고 실제로 뭘 좀 받아보기도 하고 그랬는데도 위에서 보기에는 아직도 부족해 보였나 봐.
소설 본문 중에서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진입함으로써 다시 수직주의자의 말석이라도 차지한 주인공은 연정의 대상이었던 수평주의자 여성을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그녀가 수평주의를 전파하는 책의 저자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주인공. 그녀의 북 콘서트 때마다 책을 사서 그녀에게 사인을 받는다. 그의 존재를 눈치챈 그녀도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둘은 연인과 친구의 중간에서 플라토닉 러브를 주고받는다. 계급과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연대.


그냥 그 사람이 좋았어.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다 진짜인 것 같았지. 이듬해에 그 여자가 '520층 연구'라는 책을 냈는데, 그게 아마 30년 수평주의 역사상 제일 아름다운 책이 아니었을까. 7년간 520층에 살면서 관찰한 것들을 수평주의 이론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통찰력만으로 서술해낸 책이었는데, 말 그대로 딱 520층만 가지고도 그렇게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오다니, 빈스토크 전체로 놓고 보면 그런 게 6백 개가 더 있다는 거잖아. 그러니 수평주의자들 이야기가 자연히 수긍이 갈 수밖에.
소설 본문 중에서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은 수평주의자와 수직주의자의 부적절한 만남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견제를 받게 되고 설상가상 그녀가 테러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으면서 주인공도 경찰의 소환을 받게 된다. 무혐의로 석방되기는 하지만 테러 사건 이후로 그녀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주인공은 하루하루 의미 없게 재미없는 일상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되는 그녀의 진실, 여기까지만 말해야겠다. 재발간한지 얼마 안 된 배명훈 작가의 타워가 많이 팔리기를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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