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어쩌면 스무 번을 읽고
편혜영 어쩌면 스무 번을 읽고
약을 충분히 먹였는데도 간혹 장인이 일찍 깨어날 때도 있었다. 잠이 깨면 장인은 암막 커튼이 쳐진 불 꺼진 방의 어둠에 놀라 괴성을 지르며 울었다. 여러 번 가르쳤지만 불 켜는 법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하도 문을 두드려 주먹이 까지고 몸을 때려 멍이 들었다. 장인은 갈수록 사나워졌다. 수월하게 달래기 힘들어졌다. 할 수 없이 아내는 장인보다 더 사납게 굴었다. 아파트에서는 옆집을 의식해 참았는데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집 밖으로 달아났다. 옥수수밭으로 갔다. 높이 자란 옥수숫대를 헤치고 들어가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이랑에 앉아 옥수숫대 사이로 서서히 해가 지는 걸 지켜봤다. 붉은빛을 띠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건 무시무시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조금 더 기다리면 하늘에 희미하게 달이 떠올랐다. 운 좋게 둥근달을 보는 날이면 옥수수밭에 숨어서 이렇게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싶어졌다. 어쩌면 스무 번, 기껏해야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눈가가 시큰해졌다(편혜영 작 '어쩌면 스무 번' 본문 중에서).
편혜영의 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는 알 수 없는 불편함에 그녀의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고 내려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내 접어놓은 부분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녀만의 매력이 있다. 그렇기에 편혜영의 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는 있을지언정 편혜영의 소설을 한권만 읽는 독자는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녀의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불편함의 근저에는 일상을 바라보는 그녀만의 기울어진 시선이 있다. 아니 우리가 그녀를 삐딱하게 바라본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선량한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공포스럽지는 않잖아? 하는 자기 위안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을 부대끼게 한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그 속에 호러만이 아니라 나의 일상이 투영되고 녹아있다는 사실에 독자들은 가슴 한편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스무 번' 속의 주인공들은 도시 생활을 접고 치매인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하여 근교의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온 선량해 보이는 부부이다. 그들의 일상을 동네 주민과 선교사, 보안업체 직원들이 사적인 호기심과 흑심을 갖고 자꾸 침범하면서 그들은 전원생활의 꿈이 망가지는 피해자로 보인다. 처음에는...
일그러지고 변태스럽기까지 한 방문자들을 묘사하지만 점점 부부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방문자들보다 그들의 모습이 더 그로테스크하고 괴기스럽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호러가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아니 우리 모두의 마음 깊숙이 잠재된 악마성이 소설을 통하여 폭로되면서 독자들은 불쾌함과 함께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중독성이 편혜영 소설의 특기이다.
2000년 소설 '이슬 털기'로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2011년 '저녁의 구애'로 젊은 작가상과 동인문학상을 받으며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중견 소설가로 도약한다. 2014년 단편 '몬순'이 이상문학상을 받으면서 커리어의 정점을 맞이한다. 이후 2018년 장편소설 '홀'로 국제적인 스릴러 문학상인 셜리잭슨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외국에서도 인정받는다.
명지대학교에서 문예창작과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는 그녀는 앞으로도 그녀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독자들에게 계속 선보일 것 같다. 그녀가 인터뷰 등에서 누누이 밝혀왔듯이 소설을 쓰는 일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녀만의 아우라를 가진 이야기와 마약처럼 중독적인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행복을 계속 느끼고 싶다. 우리들의 안온한 하루가 약간만 비틀어지면 우리도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자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