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피어난 시인의 꿈

광화문에서

by 하기

광화문에서



광화문 사거리를 걷다가

백석을 생각한다

포마드로 말아올린 바람머리를 휘날리며

신문사에 출퇴근하던 그를...


성북동 길상사를 거닐다가

자야*를 생각한다

눈이 푹푹 나리는 밤 산골로 가자던

백석을 뿌리치고 떠난 그녀를...


삼청동 북촌에서 평양냉면을 먹다가

백석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우리 아들이 왜 이렇게 늦게완.”하며

꿩고기를 얹어 냉면을 말아주던 어머니를...


오늘도 시위와 집회가 이어지는 광화문에서

퇴근길 추위에 머플러를 두르고


코트의 단추를 채우며 나는 생각한다


또 다른 백석과 자야,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 백석의 연인, 본명 김영한 법명 길상화, 백석과 헤어지지만 평생 그를 그리워하다가 백석이 죽고 4년후에 죽는다. 평생 모은 재산과 운영한 요정 대원각 터를 법정스님에게 기부해 스님은 그녀를 기려 길상사로 사찰명을 정한다.





나의 꿈


시인을 꿈꾸는 나는

글센스가 없다


사진작가를 꿈꾸는 나는

눈썰미가 없다


생활탁구 1부를 꿈꾸는 나는

운동신경이 없다


글센스도, 눈썰미도, 운동신경도

없는 나는


오늘도

시인을 꿈꾸고

사진작가를 꿈꾸고

생활탁구 1부를 꿈꾼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송년회



친구여 잔을 들게나

오늘은 송년의 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자신도 해치니

잔속에 담긴

미움, 회한, 증오는 다 마셔버리고

새로운 잔에는

사랑, 행복, 감사의 마음을 담게나


친구여 잔을 들게나

오늘은 송년의 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올해 안에 고백하게나

사랑은 타이밍

선고백 후행동이라네

부디 때를 놓치지 말고

내년에는 사랑의 결실을 거두시게나


친구여 잔을 들게나

오늘은 송년의 밤


오늘만은 그대 어깨에 놓인 짐

다 내려 놓고 마음껏 웃고 즐기고 가게나

그리고 자기자신에게 말해주게나

올 한해 수고했다고...





콘크리트 위의 새싹


콘크리트 위에 새싹이 돋아났습니다.

여리고 여린 새싹이

두꺼운 콘크리트를 뚫고

힘겹게 피어났습니다.


해가 주는 햇빛을 받고

구름이 주는 빗물도 먹습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새싹을 밟고 또 밟고 지나갑니다.

때로는 자동차들의 무거운 바퀴가

어린 새싹을 짓밟고 무심히 달려갑니다.


하지만 콘크리트 위의 새싹은 용감하고 씩씩합니다.

척박하고 메마른 콘크리트 위에서

굳건하게 꼿꼿이 자랍니다.


졸음에 지쳐 눈을 비벼대는 새싹에게

민들레홀씨 날아와 꽃을 피워 친구가 되어줍니다.

세찬 장맛비에 고개 숙인 새싹에게

길가의 해바라기 우산이 되어 줍니다.


낙엽이 새싹 옆에 떨어져

맛있는 거름이 되어주고

하얀 눈 내려와 새싹을 포근하게 감싸주면

새싹은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다시 찾아오면

콘크리트 위에 새싹이 다시 피어납니다.

쑥쑥쑥 쑥쑥 키도 커지고.

두려움도 없이 끝도 없이 자라납니다.




시상



변비가 왔다

짜내도 짜내도 나오지 않는다


언어의 신이 나를 거부하는 시간

내면의 배터리를 충전해야 한다


여행, 사색, 경험

삶에 대한 통찰

시에 대한 열정이

채워지는 순간


그분은

다시 찾아온다





노원역 할미꽃




노원역 사거리

하얀 눈 수북이 머리에 내려앉은

할미꽃 한 송이 피어있다


반 늙은 내가 다가가면

꽃의 눈은 나를 향해 열린다

장미와 후리지아, 안개꽃 모두어

특별한 데코레이션 서비스

내 눈은 알싸해지고

꽃향기에 코는 벌써

오늘밤을 냄새 맡는다


거리에는 연신 커플꽃들이

또 다른 꽃들을 부르고

할미꽃은 잃어버린 세월 속에

자신을 찾아 온 나비의 춤을 본다

한때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준비된 꽃다발들

잎들은 모두 말라 가지를 떠나고

꽃비 되어 하얗게 하얗게

거리를 적신다


누구든 전성기가 없었을까 마는

다만 그 세월이 가늠하기에는 너무 멀다

꽃 속에서 보낸 30년

지아비도 아이들도

모두 국화꽃으로 보낸 시간들

마디마디 꽃다발에 매듭지어

가슴에 새겨진 얼굴들


내리던 눈들도 얼어버린 한파에

인적 드문 노원역 사거리

어디선가 꽃을 찾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머리에 하얀 눈 내려앉은 할미꽃 한 송이

고개 숙여 졸고 있다





일상



오늘도 창밖으로 일상의 해가 진다


도봉산 인수봉 아래로 번지는 밍밍한 노을빛

저물기 전에 잠시 노을은 붉게 불타오르며

하루의 끝을 뜨겁게 반추하지만

고집도 없이 해가 지면 그 뿐


하루는 그제처럼 또 어제처럼 저물어 간다


천년이 지나도 일상은 스치듯 흘러갈 것이다

천 년 후의 하루도 오늘처럼 저물어갈 것이다

중랑천을 산책하는 강아지도 천변 가로등 밑에서

천 년 전의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운동기구에서 운동을 하던 노인의 뒷모습은

천년 후의 나일지도...

저물어가는 일상을 똑같이 보내고 싶지 않은

오늘의 나는 천년 후의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천 년 후의 나, 천 년 전의 나

묵묵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내일도 일상의 해는 어제처럼 또 오늘처럼 저물텐데...





구피의 꿈



이미 알고 있었지 나는

니가 처음 오던 날

너의 운명을


하지만 못생긴 너는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며

운명을 거스르려 했지


평균수명을 다한 너의 동족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운명을 비웃듯 너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더구나


오늘 떠오른 너의 푸른 몸뚱이에

경의를 표한다

언젠가 나도

그 길을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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