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마지막 행운 - 7
영희의 변심을 알게 된 건 제주도 좌천이 결정되고 쓸쓸한 마음에 영희의 집을 찾아가게 된 날이었다. 혜화동에 있는 영희의 아파트를 찾아가서 처음 키스를 했던 벤치에 앉아 지난 추억을 반추하며 회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영희의 목소리가 들려 반가운 마음에 아파트 현관 쪽을 쳐다보니 영희 혼자가 아니었다. 말쑥한 정장차림의 남자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몇 번인가 업무 때문에 우리사무실을 찾아 온 김동호세무사였다. 둘이 대화를 하고 웃는 모습이 첫눈에 보기에도 다정한 연인같았다.
김세무사가 자신이 몰고 온 아우디 승용차를 몰고 사라진 후 나는 영희 앞에 나타났다. 영희는 나를 보고 흠칫 놀랐지만 이내 시치미를 떼고 나에게 말했다.
“왔어. 미리 연락하지. 깜짝 놀랐잖아.”
“김세무사랑 무슨 사이야.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던데...”나는 영희를 다그쳤다.
“무슨 사이긴. 저번에 물납신청한 것이 잘 해결되어서 고맙다고 퇴근하는 길에 방향이 같아서 차 태워준거야.”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는데 다른 남자랑 둘이서 데이트하는 거 반칙아니야.”
“결혼을 약속하긴 누가 결혼을 약속해. 그렇지 않아도 근배씨한테 내 뜻을 정확히 밝히려고 했는데 그동안 근배씨가 파나마출장 때문에 너무 바빠 말할 기회가 없었어. 솔직히 난 가난한 공무원인 남자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 내가 공무원이니까 남자라도 능력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근배씨는 연애상대로는 좋지만 결혼상대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속물이라고 욕해도 상관없어. 우리 헤어져.”
마치 준비라도 한 듯이 말하는 그녀 앞에서 나는 배신감에 치가 떨렸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여자를 붙잡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네 맘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나는 다음 주에 제주도에 내려가니까 능력있는 남자랑 잘 먹고 잘 살아.” 하고 나는 그녀를 쏘아보고 외쳤다.
그리고 돌아서서 가는 내내 뒤돌아 보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녀가 불러주기를 끊임없이 기대하며 걸어가는 나의 눈에 촉촉하게 빗물이 고였고 빗물인 듯 눈물인 듯 흘러내리는 물기가 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수영장에 갈 수 없었다. 영희도 더 이상 수영장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퇴근 무렵 같이 수영을 배우던 손민상반장과 이진성반장이 호프라도 한잔 하자고 했다. 나는 앞으로 수영장에 못갈 것 같다는 얘기도 하고 제주도에 가기 전 수영동호회 마지막 회식도 할 겸 그들과 종각역근처에 치킨집으로 향했다. 치킨집은 2층에 있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우리는 치킨 한 마리와 3,000 CC 생맥주를 주문하였다.
“근배씨 영희씨와 헤어졌다며...제주도 내려가는 길이 쓸쓸하겠네.” 손반장이 말했다.
사내연애를 하게 되면 이렇게 소문이 빨리 전파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렇게 됐어요. 제주도에 내려가면 어차피 자주 보기 힘들어 자연스럽게 헤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잘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영희씨 그렇게 안봤는 데 못됐더군.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혼남인데 처녀가 돈만 너무 밝히는 거 아닌데. 헤어졌다니 하는 말이지만 잘 헤어졌어.” 이반장이 계속 말을 했다.
“근배씨 파나마에 출장 간 사이 알게 됐는데 김동호세무사랑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 같아. 영희씨가 최근 몰고 다니는 미니쿠페도 김세무사가 선물한 거라는 데...잘나가는 억대연봉의 세무사가 접근하니 우리같은 가난한 공무원이 눈에 들어오겠어. 확실히 예쁜 여자는 얼굴값한다니까.”
“영희씨도 안나오고, 근배씨도 제주도로 내려가고 이젠 수영동호회도 쓸쓸해지겠네.” 손반장의 말에 우리는 모두 아쉬운 듯 생맥주를 건배하며 들이켰다.
그들과 헤어지고 나는 취기가 올라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를 사서 집근처 다리 위로 올라갔다. 숙취해소제를 마신 후 건너편 다리를 보니 하얀 원피스를 입은 이수정이 있었다. 그녀는 원망섞인 눈으로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갑자기 미워져,
“도대체 나에게 바라는 게 뭐야.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하며 숙취해소제 병을 그녀가 있는 다리 쪽으로 던졌다.
던지고 난 후 그 쪽을 바라보니 그녀는 사라졌다. 나는 문득 그녀가 나에게 원하는 게 있을 지도 모른다는 신혜주 반장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내일은 연가를 내고 그녀를 처음 만난 Y의 아파트 주차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에 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느낌이 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