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회사는 무엇이었을까?
퇴사 후 여유를 만끽하고 있던 어느 날. 오랜 친구를 만났다.
퇴사하니 어떻냐는 친구에게 퇴사 후의 내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여러 모로 꽤 만족스럽다고 답을 했다.
"퇴사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보다 만족감이 커. 주말 부부를 오래 해 봐서 아는데, 할 게 못 돼.
아이와 남편과 함께 하는 삶이 난 좋아. 만약에 워킹맘으로 주말 부부를 해야 했다면 많은 행복을 포기해야만 했을 거야."
이 멘트들이 다소 구차한 변명 같다고 스스로 느꼈을 그때,
알 수 없이 찔금 찔금 짠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머리와 몸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데,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은 듯 자연스럽고 안정적인데 그 이야기를 하며
나는 왜 서러운 눈물을 흘렸던 걸까.
맞다. 생각은 자주 거짓을 고하지만 몸은 절대로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유롭고 만족한다는 그 말은 100퍼센트 진실이 아니다. 분명 짠 눈물이 한 층 진실에 가깝다.
그 대화는 퇴사가 나에게 적지 않은 상실과 슬픔이었음을 인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상실감에 가끔 오금이 저리고, 또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현재 삶에 더욱 자리를 잡으려고 나의 생각을 붙들어 온 터였다. 그렇게 다져진 생각들이 퇴사에 대해 미련 없는 만족감으로 포장이 되었다.
내 나이 27세부터 38세까지 11년 간 한 회사에 몸을 담았다.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공부를 한 시간까지 따지면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적응하기 위해, 활약하기 위해서 몸부림친 시간이 참 길고 길다.
27세에 입사한 회사는 나에게 특별한 안정감을 선사했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경제적인 안정감, 평생 다닐 직장이라는 소속감,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입증되는 프리패스의 명확한 신분.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분들은 나에게 자긍심을 주었다. 모두 세련되고 멋져 보였다. 회의실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모습도, 예산안을 만드는 것도. 모두가 분주해 보였고, 내가 앞으로 우리나라 교육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서울의 가장 중심부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한 몫했다.
동경해왔던 서울에서의 안정적인 정착. 출근하고 점심을 먹을 때마다 서울의 인파를 온몸으로 느꼈고, 서울의 중심지를 활보하며 나 역시 세련된 서울 여자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입사 3년 후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 정책으로 인해 회사는 대구로 이전을 했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낳기 전까지 우리 부부는 3년 간 주말 부부를 했다.
주말 부부는 나보다는 남편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서로 떨어져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소원해지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바빴다.
나는 일과 학업에 대한 욕심에 아이 갖기를 계속해서 미루었고,
남편은 주말 부부 생활에 외로움을 느끼며 간절히 아이를 원했다.
결혼 후 6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남편의 간절한 요청과 상의하에 아이를 갖기로 했다.
조금 늦은 나이 35. 모성애가 전혀 없을 것 같았던 나는
완전한 아들 바보가 되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극성 엄마'가 되었다.
하나의 일에 꽂히면 열과 성을 다하는 나는
아이의 육아에 열과 성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회사에 돌아갈 생각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육아휴직 기간이 끝날 때까지 수없이 고민을 했지만 마음은 이미 퇴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내 앞의 아이가 너무 소중했다.
아이가 아빠와 함께 살았으면 했고, 나 역시 남편과 함께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며 살고 싶었다.
분명 퇴사는 나의 선택이었다.
가끔 누군가가 조언을 하거나, 가족은 함께 살아야 가족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런 조언에 따라 선택을 할 내가 아니었다. 나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는 나의 책임이 뒤따라야 했다.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어왔던 그 선택을 감행하던 그날이 기억에 떠오른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회사 방문과 작별 인사. 덤덤하고자 노력했지만 두 볼을 타고 내렸던 눈물.
나의 마음의 한 켠에는 아쉬움과 상실감이 가득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흘린 눈물에 한편으로 놀라며
회사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다시금 떠올려 본다.
회사는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매월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 곳? 아니면 나에게 소속감을 주는 곳?
내가 사회에 어떤 도움을 주는 존재임을 남들에게 증명해주는 곳?
부모나 형제가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곳?
아니면 11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정감 어린 고향 같은 곳?
나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곳?
아마 이 모든 것들의 어떤 조합일 것이다.
두루뭉술한 느낌을 표현하자면 나의 20~30대 청춘을 바쳐 열심히 일궈온 밭을
어딘가에 버려두고 온 듯한 느낌. 나날이 황폐해져 가는 그 밭을 상상하는 느낌.
어쩌면 나는 회사에 소속된 '연구원'이라는 신분을 나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어디를 가나 자신 있게 내 보일 수 있는 나의 명함을 자존감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회사를 퇴사하고 나니, 한쪽이 텅 빈 듯한 느낌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 후 다시금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회사에서 규정한 신분이 나 자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작은 명함에 적힌 정보가 내 존재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친구 앞에서 흘린 눈물은 나의 내면으로 시각을 돌려보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