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면 어떤 느낌일까?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MDD 동온 디지털 드로잉 모임에서 처음 왼손으로 그릴 때의 생각이었죠. 직접 그려본 경험은 "부담이 없다!"입니다. 오른손으로 그릴 때 저의 경우는 너무 성의 없게 그려서는 안 된다, 나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받쳐주지 못할 때는 좌절하기도 하고 제출 인증을 하지 않기도 하죠. 왼손은 어떨까요?
1. 일단 부담이 없어요. 왼손으로 그리니까 실수도, 부족한 것도 일단 "괜찮아, 왼손이야"스스로 생각하니 그릴 때도 제출 인증할 때도 부담이 없어요.
왼손으로 그리니까 최소한으로 그리려고 하고 불필요한 것을 최대한 덜어내게 돼요. 왼손으로 그리는 데는 시간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작은 소품 하나 그릴 정도로 무언가 대상을 선정하죠. 전체 배경을 칠할 여력도 없어요. 딱 필요할 만큼만 그리는 2. 절제의 드로잉이 되는 거죠.
3. 집중력과 정성이 들어가는 드로잉이 왼손 드로잉의 매력이에요. 오른손도 집중력과 정성이 들어가지만
왼손이 더 그런 것 같아요. 오른손처럼 빨리 그릴 수 없으니 더 생각하면서, 더 조심스럽게 사색하면서 그리게 되니까요. 내가 선을 그릴 때 이렇게 정성스레, 조심스레 그렸나 되돌아봐요.
MDD는 매주 수요일이 왼손 드로잉 날인데요. 5월에는 필사한 책 리스트를 그려보기로 했어요. 제가 제일 먼저 필사한 책은 2020년 코로나 시기 모든 게 멈췄던 시절에 '어린 왕자'를 혼자 베란다에 앉아서 필사를 했어요. 결국 어깨가 아파서 한의원까지 갔지요. 뭐든지 과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죠. 특히 필사는 그랬어요. 그림도 그리는 분들도 그렇더군요. 몰입하면서 물아일체가 되는 경험 뒤엔 어깨가 탈 난다는 것~^^
마침 다른 모임에서 논어 필사 모집 글을 보고 11개월간 매일 두 구절씩 필사를 했죠. 겁 없이 달려들었다가 포기도 생각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필사하고 블로그에도 게시했어요. 다른 분들은 두 구절 필사만 한 분들이 많았는데 저는 한자를 쓰고, 한자음을 달고, 한글 해석을 쓰고 느낌까지 쓰는 과정을 했기 때문에 아주 큰 성장이 있었어요.
논어 필사로 필사에 대한 인식이 정말 바뀌었어요. '어린 왕자'를 필사할 때는 아름다운 문장이구나 생각하고 끝냈는데 논어는 제가 질문도 만들고 실천할 내용도 만들고 느낌도 쓰고 블로그에 올렸더니 사고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느낌을 썼고 그 느낌을 쓰려면 두 구절을 분석해야 하고 관련 배경지식도 찾아야 했어요.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매일 11개월 동안 필사하고 블로그에 게시했으니까요. 필사는 10분 이내로 끝났는데 배경지식과 느낌 쓰기는 2~3시간 걸리는 날이 많았지만 아주 의미 있던 날들이었어요. 필사는 필사만으로 끝나면 필사에 그치지만 나의 느낌이 추가되면 나의 글이 되죠.
논어 필사를 마치고 필사 팀을 직접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논어'는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좀 더 쉬운 책을 찾다가 '갈매기의 꿈'으로 시작했어요. 혼자 필사했을 때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도전하는 조나단이 꼭 나의 모습, 우리들 모습이었어요. 그리곤 이어서 '니체의 말'필사 팀도 운영했어요.
명언 같은 니체의 말은 한 페이지마다 감동적인 글이었어요. 니체의 말 중에서 발췌를 한 책이어서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어요. 이 책 역시 필사는 10분 안에 끝나지만 사색 여부에 따라 시간이 많이 소요되곤 했죠.
그 당시에는 제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읽기도 어려웠고 필사할 엄두도 내지 못했죠.
도덕경 필사도 논어만큼 어려웠지만 3개월 과정이라 휘리릭 지나간 느낌이었어요. 같이 동행했던 분과는 아직도 만남을 유지하고 있어요. 아주 어려운 마라톤을 같이 뛴 느낌이어서 동지애가 있어요.
도덕경은 한시라서 한자 해석과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해석하느라 아주 진땀을 뺐던 기억이 있는데 그 도덕경이 나중에 읽었던 최진석 교수의 '건너가는 자', '반야심경'과 니체의 책, 헤르만 헤세의 책들과 공통점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어요.
한글, 한자 필사뿐 아니라 영어 필사도 아주 흥미로웠어요. 영어 필사는 제가 운영하지 않고 갈매기의 꿈 필사 팀에 합류하셨던 영어 원장님에게 제안했고 그분이 운영하셨어요. 갈매기의 꿈 영문판,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꽃들에게 희망을 영문판을 필사했어요. 특히 꽃들에게 희망을 이 책은 그림까지 모두 직접 그려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갈매기의 꿈'은 한글로 5회 정도 전체 필사를 해서 한글로 읽을 때마다 영어로는 원래 어떤 표현이었는지
너무 궁금했던 갈매기의 꿈이었거든요. 그 궁금증이 영어 필사하면서 해소되었고 특히 류시화 작가의 한글 번역과 비교하며 필사했는데 무척 맘에 들었어요. 왼손 드로잉으로 책 표지를 그리면서 꾹꾹 놀러 필사했던
순간들이 모두 생각났어요. 니체는 피로써 글을 쓰라고 했는데요. 그만큼 정성스레 진심을 다해 쓰라는 말이겠죠.
필사가 그랬고 그 필사의 흔적을 더듬어 왼손으로 천천히 드로잉 하는 느낌은 아주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아요.
필사한 책 중 시집 필사 출간 모임 11기 하면서 필사한 시집은 그리지 못했는데요, 기회가 되면 그려보려고요. 그것도 왼손으로. 왼손만의 느낌과 집중력이 있거든요.
그리고 현재 필사하고 있는 책은 이성복 작가의 '무한화서'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아마 1년 후 필사가 완료될 것 같군요. 필사를 정성스럽게 하는 이유는 좋은 문장을 만나서 좋을 글을 쓰기 위함이에요.
드로잉도 현재는 모방 위주의 그림이지만 언제가 나만의 멋진 작품, 그림책을 출간할 희망을 가지고 그리고 있어요.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 책에서 능숙하게 되려면 1. 훔치기(모방하기) 2. 요약하기(질문하기) 3. 추진하는 힘(나만의 스타일) 3단계가 필요한데요. 저는 글쓰기도, 드로잉도 훔치기(모방하기)에서 시작해서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필사는 노트에 오른손으로 했고 드로잉만 왼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