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이런 식이지
며칠 전, 당근마켓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다. 워낙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회사다 보니 다들 이것저것 물었다. 근무환경이 그렇게 좋다며? 인재풀도 좋고. 월급은? 일은 재밌어? 어려운 IT 용어가 오가는 걸 보며 내 친구들도 이제 밥벌이를 하네 싶어 대견했다. 그리고 프리랜서인 내 차례가 와서 물었다.
“당근은 뭘로 돈 벌어?”
그는 ‘광고’라고 답했다. 어플 사용할 때 뜨는 그 조그마한 광고? 그걸로 400명 넘는 직원들 월급 줄 돈이 나온다고? 생각해 보니 신문사, 방송국, 인플루언서, 유튜버 모두 광고로 돈을 벌었다. 하지만 광고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성가시게 하는 일이다. 길에서 나눠주는 전단지처럼. 그리고 내게 필요하지 않은 걸 사게 만들지. 과연 그게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인지 회의가 들어 물었다.
“광고 말고로는 돈을 벌 수 없는 걸까?"
“그걸 ‘새로운 먹거리’라고 해~ 우리 회사 신사업부서에서 찾고 있는...!”
당근마켓의 최전선 인재들이 하는 일, 그것은 내가 하는 일과 같았다. 어떻게 창의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 것인가. 비록 다음 달 월세 낼 걱정하는 처지지만, 스스로를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그러니까… 내 인생의 신사업부서 팀장 같은 거라고.
자, 그래서 남은 95만 원을 어떻게 벌어야 할까. 고민하다 우연히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내가 책을 읽는 방법' 1년에 100권 넘게 읽으며 책을 숭배하기로 유명한 철학자 지니의 블로그였다. 평소 책을 읽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던 나는 읽다가 충격받았다.
<지니가 책을 읽는 방법>
1. 돈이 생기면 책을 산다.
2. 주말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시간이 생기면 책을 읽는다.
3. 한번 책을 잡으면 웬만하면 끝까지 완독 한다. (어려운 철학서 제외)
4. 완독하고 나면 빌려온 책은 도서관에 반납하고 산 책은 알라딘 중고서점에 판다.
5. 나는 책을 깨끗하게 읽기 때문에 100% 최상으로 팔린다. 나에게 책은 읽기 전과 읽은 후가 별로 달라지지 않는 사물이다.
6. 중고서점에 책을 파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서재 책장에 책이 가득 차서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책을 판 돈으로 다시 책을 사기 위해서다.
7. 그렇게 중고서점에 책을 팔아서 공간과 돈이 생기면 다시 책을 사 온다.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서 나는?
<정성은이 책을 읽는 방법>
1. 현실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책에서 답을 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교보문고로 달려간다.
2. 10권 정도 책을 사고 그걸 인스타 스토리에 찍어 올린다.
3. 서재에 가지런히 꽂아둔다.
4.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기 때문에 마음에 안정을 찾는다.
5. 다시 1번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이미지를 얻었으나, 실제론 거의 책을 안 읽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완독 한 책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2020년에 나온 정대건 작가의 <GV 빌런 고태경>이었다. 책장을 바라보았다. 위로받는 제목이 가득했다.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 아닐 세스의 <내가 된다는 것> 박권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벨 훅스의 <사랑은 사치일까?>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마디가 마틴 <시나리오 쓰기의 모든 것> 비키 킹 <21일 만에 시나리오 쓰기> 간다 마사노리 <비상식적 성공법칙> 존 윌리엄스 <스토너> 민음사 시집 12권, 릿터 20권, 필로 5권...
책을 읽진 않지만, 소유한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던 나. 나와 어울리는 사람들의 성취를 내 것으로 생각했던 나. 좋은 걸 발견했을 뿐인데, 그걸 만든 것처럼 생각했던 나.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걸까. 격파하지 않고 KEEP 해둔 게 삶에서 몇 개인지 셀 수가 없네.
좁은 집엔 새 책들로 넘쳐났다. 손때 묻은 책들엔 앞부분만 줄이 쳐 있었다. 내 삶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나도 저 사람처럼 살고 싶어졌다. 이제부턴 진짜 읽을 책만 사는 거야. 그리고 산 책은 무조건 다 읽어 보자. 집에 있는 책을 다 갖다 팔았다. 영화와 글쓰기, 페미니즘과 심리학을 제외한 300권 가까이 되는 책을 캐리어 2개와 에코백 5개에 담아 택시를 불러 종로 알라딘 서점에 내렸다.
그렇게 30만 원 벌었다.
이제 65만 원 남았다.
"무엇으로 돈을 벌고 싶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예전엔 '좋아하는 일로요!'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요!' 같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사람들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해 주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돈을 벌고 싶다. 워크숍이 될 수도 있고, 창작물이 될 수도 있다. 멋진 사람들이 모여 인사이트 넘치는 시간을 만드는 게 아닌, 누가 와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 재밌는 글을 써서 (혹은 영상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고, 사는 걸 좀 괜찮게 여기는 것. 그래서 각자의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되어 숨통 트일 수 있게... 나에게는 일상에서 소재를 발굴해 괜찮은 에세이로 써내는 필력과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그걸 보기 좋게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작가로서 그 일을 계속해보고 싶고, 그 첫 번째 결과물인 대화 산문집 <궁금한 건 당신>이 소정의 목표를 달성했기에 (빠르게 읽히고, 독자들을 웃고 울린다는 점에서)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그럼 나는 이 책이 1000부 중쇄 될 때마다 160만 원을 벌게 된다.
하지만 책이 알려지기란 쉽지 않다. 출판사에서 마케팅을 위해 힘쓰고, 북토크를 열어주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돈이 드는 일이기에 가성비가 맞아야 했다. 만약 지방의 서점에서 북토크를 연다고 하자. 나와 편집자님의 왕복 교통비와 대관료 등의 돈을 들이는 만큼 돌아오는 게 있을 것인지에 대해 출판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서점 역시 마찬가지다. 모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무명작가고, 내 책을 읽은 사람이 많이 없는 상태다.
출판사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책을 홍보할 방법은 없을까? 나는 마침 본가인 부산에 내려갔고, 그 김에 독립서점들에서 번개 이벤트라도 하면 어떨까 해서 메일을 보냈다. 부산 사는 친구에게 네가 생각하는 가장 괜찮은 독림서점을 말하라고 하니 3곳을 말했다. 주책공사와 나락서점과 카프카의 밤. 나는 가장 규모가 큰 주책공사부터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부산에 사는 책 좋아하는 친구에게 '부산에서 어느 독립서점을 가장 좋아하니?' 물었을 때
김준희라는 친구가 이곳을 좋아한다고 가르쳐주어서 이렇게 메일 보냅니다.
저는 안온북스에서 <궁금한 건 당신>이라는 대화 산문집을 펴낸 정성은 작가라고 합니다.
서효인 편집자님께서 제 책을 만들어 주셨어요.
<헤아림의 조각들>을 재밌게 읽으셨다는 포스팅을 보고 저도 임지은 님 팬으로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
제 소개를 조금만 더 하자면
저는 신문 지면에서 7년 정도 칼럼을 썼고, (URL링크 첨부합니다.)
본업으로는 영상을 제작하는 PD일을 하다가,
현재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연마하며 그 과정을 에세이로 쓰면서 다음 책 '치부노트'를 준비 중입니다.
전업작가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요.
제가 사장님께 메일을 보낸 이유는,
<궁금한 건 당신> 이 참...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좋은 책이에요.
이 책은 재미있고, 읽기가 쉽고, 뭉클하고, 그리고 정치적인데, 읽는 누구든 생각이 다르더라도 끄덕이며 읽을 수 있는...
다 읽고 나면 세상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입니다.
하지만 책의 운명이란 게... 오랜 시간 만들었지만 대형서점에 소개되고 누워있는 기간은 잠깐이다 보니
이 책을 필요로 하는 좀 더 많은 독자들에게 가 닿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단순 북토크를 열 수 있는지 여쭙는 메일일 수도 있지만
북토 크도 어떤 기획이 필요하고, 단순 책에 대한 얘기보다는 그 시간이 참가자로 하여금 영감이 되는
도움이 되는 시간이어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장에 뭔가를 제안하는 메일은 아니고요,
제 본가가 부산입니다.
그래서 8/8 다음 주 화요일부터 적게는 3일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조금 더 길게 부산에 머물 예정인데요!
많은 문화활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몰려 있다 보니..
부산에 갔을 때 제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제 책을 사람들에게 닿게 하면서도 주책공사 서점의 운영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적극 쓰임 당하고 싶어 부끄럽지만 이렇게 메일 보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은...
* 잘 듣고 좋은 질문을 던져 다른 사람의 내밀한 이야기 끄집어내서 듣는 사람은 흥미롭고 하는 사람은 후련하게 만들기.
* 인터뷰 잘하는 법, 흥미로운 글 쓰는 법, 솔직해지는 연습, 수치심을 다루는 법에 대한 강연.
* 책을 내는 과정에서 겪은 (편집자에게 연락오기, 주변 인물 소재로 쓰기, 추천사 요청하기, 거절당하기, 엎어지기 등 성취와 좌절과 그 때 배운 것들) 이야기들
* 다른 사람이 쓴 글 더 읽기 쉽게 고치기.
* 내 이야기 중에서 세상이 흥미로워할 만한 것들 기획하기.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 영상작업은... 돈을 받고 하는지라 선생님에게 부담을 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부산에 갔을 때 위의 일들은 제가 돈을 받지 않아도 흔쾌히 알 수 있는 일이어서
혹시나 좋은 기회가 있을지 해서 여쭙니다.
저도 기획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먼저 제안한 일이 아닐 경우
실제로 뭔가를 하기가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음 주까지 기간도 촉박하고요. 그러니 편하게 생각해 주시고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
출판사를 통해 연락드릴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편집자님도 이동하고 교통비 등... 쓰이는 돈이 있다 보니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해서 이런 메일을 써 보게 되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책을 내어 보니 더욱더 독립서점의 역할을...
좋은 책을 큐레이션 하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작은 이야기들을 세상에 퍼트리는... 이런 활동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되었어요.
(아부 아닙니다. 제 책 해달라고 하는 거 아닙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정성은 드림.
그리고 몇 시간 뒤 바로 답이 왔다. 연락줘서 감사하다고. 하지만 북토크 같은 경우 거마비, 대관비 등 출판사와 협의해야 할 일이 많이 때문에 출판사에서 마케팅 차원으로 제안해주시는 게 좋다고. 아무리 적은 규모의 이벤트라도, 모객이 되려면 한 달 전에는 공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다음 주에 뭔가를 하긴 촉박할 것 같다고. 혹여 내가 상처받을까 봐 전화로 친절히 가르쳐주셨는데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웠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들이댄 건 아닌지. 그래서 나락서점과 카프카의 밤엔 메일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출판사에도 말할까 하다 쪽팔려서 말 안 했다. 그런데 다음 날, 편집자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부산의 나락서점이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행사 제안이 왔어요. 9월에 되시는 날짜 언제예요?"
아차 싶었다. 거절당했다고 무서워하지 말고 한번 더 메일 보낼걸. 하지만 결국 이렇게 이어졌으니, 잘 된 일이다. 여기 온 사람들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하면, 또 다음 기회가 오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평범한 북토크가 아닌, 오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짤 수 있을까? 힌트를 얻기 위해 서점에 갔다. 예전에 어떤 친구가 에세이스트이자 언니네이발관의 리더인 이석원의 강의에 큰 감동을 얻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나를 위한 노래>라는 책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니, 얼마나 스토리텔링을 잘하고 좋은 시간을 선물했길래 책으로까지 만들어졌나?
책값은 14,000원이었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도 빌릴 수 있어 순간 사기가 주저되었지만, 내 책이 팔리기 위해선 남의 책도 사주어야 된다는 생각과, 돈 쓴 만큼 얻어 가리라 마음먹고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집에 있는 책을 다 버리고 처음 사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