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으로 할머니 되기
돈을 잘 벌 땐 오마카세 12만 원도 괜찮은 가격이라 느껴졌다. 돈을 못 버니 커피값 4천 원도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다. 내 인생의 유일한 낙이니까.
우리 집 근처엔 맛있는 커피집이 있다. 매일 거기서 아이스 라떼 한 잔과 쿠키 한 조각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2천 원짜리 쿠키가 사라지고 4천5백 원짜리 파운드케익이 나타났다. 매일 먹기엔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과 혈당. 가볍게 디저트와 커피를 곁들여 먹고 싶은 나에겐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외부 음식이 반입 안 되는 곳이었고, 워낙 좁다 보니 사각지대도 없는 카페였다. 포기하고 커피만 마시던 어느 날,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올라왔다. 가방 안엔 초코파이가 있었다. 몰래 먹을 방법이 없을까. 화장실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급하게 손을 떨며 초코파이를 뜯었다. 가방 안에서 오래 뒹군 녀석은 떡이 되어 있었다. 입에 털어 넣고 쓰레기를 버리려는데 떡진 덩어리들이 손 끝에 달라붙었다. 얼른 나가서 손 씻어야지 하며 문을 여는데 사장님이 계셨다. 내 손을 보았다. 검고 진득한 것들이 묻어 있는... 순간 나는 화장실에서 외부음식을 몰래 먹은 단골손님이 되기보단, 손에 똥을 묻힌 사람이 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다급히 손을 씻고 줄행랑쳤다.
덕분에 그곳에 못 가고 있는지 10일 차... 커피값 5만 원 아꼈다. 그리고 행복도 끊겼다.
얼마나 돈으로 산 행복이 많았는지 새삼 느낀다. 친구는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친구와 만나는 시간은 돈을 써야 유지된다. 내가 그걸 못할 것 같으니 일단 돈으로 지르고, 꾸역꾸역 한 게 얼마나 많았나. 독서모임, 영어학원... 그 외 정신적인 문제부터 체력까지. 수입이 줄면서 가장 먼저 끝낸 것도 PT였다. 한 번 갈 때마다 5만 원씩 하는 운동을 3년 넘게 했다. 운동을 멈춘 지 1년 넘었다. 체중은 불어나고, 코어에 힘이 없어 바른 자세로 앉아 있기도 쉽지 않다. 종종 달리기도 했지만 폭염 속에 뛰러 나갔다 포기하고 걸어온 날 이후로 달릴 의지도 사라졌다.
그러다 우연히 집 근처 재미없어 보이는 건물에서 물기 있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뭐지 해서 들어가 보니 'ㅇㅇ종합사회복지관'이었다. 할머니들이 참 많았고, 게시판엔 저렴한 가격의 교육/건강프로그램들이 회원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성인피아노, 성인미술, 성인영어, 어린이 독서&글쓰기, 드럼, 우쿠렐레.... 1주일에 두세 번 하고 한 달에 내는 가격은 5만 원 내외. 이런 세상이 다 있네? 그중에서도 단연 인기프로그램은 매화반, 난초반, 저녁수영 A B C D E반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다들 수영 수영 하던데 나도 한번 해볼까?
하지만 엄두가 안 났다. 수영하면 괴로운 기억뿐이었다. 새벽 수영에 등록했다 늘 지각하던 기억, 작심삼일이다 보니 초보반만 배우기를 수차례. 비슷한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고, 수영을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만 물에는 들어가고 싶었다. 시원하고, 덜 다치니까. 무엇보다 거기 있다 나오면 밥이 꿀맛이었다. 그런 프로그램이 없냐 물으니 직원은 아쿠아로빅을 추천했다. 월수금 낮 1시. 가임이 여성이면 10% 할인도 해 5만원 초반대였대. 좋은데? 새벽에 일어나, 중요한 일 아침에 다 해버리고, 운동하고, 오후를 시작하면 딱이네. 그 자리에서 수강신청했다. 그런데 직원이 괜찮겠냐고 물었다.
"텃세가 있을 수도 있어요."
"엥?"
뭔 말이랴.
"저 친구 사귀러 온 거 아닌데. 운동... 센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젊은 분이 워낙 없다 보니. 다 어르신들뿐이거든요~"
"아~ 저 할머니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등록할게요."
며칠 뒤, 첫 수업날. 어김없이 5분 지각했고. 태어나 그렇게 많은 할머니들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냥 들어갔다가 불려 나왔다.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하는 걸 몸에 채워야 한다네. 딱 맞게 길이조절을 하니, '물에 들어가면 헐렁해져요~ 더 꽉!' 하며 묶어주는데 역류할 뻔했다. (밥은 아루아로빅 끝나고 먹는 걸로...) 마지막 줄 끝에 서서 강사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움직였다. 운동 시간 반, 트로트에 맞춰 춤추는 시간 반으로 구성된 수업이었고, 참가인원은 할머니 49명 젊은 여자는 나 혼자였다.
옆에 계신 할머니는 나에게 오늘 처음 왔냐며 이것저것 가르쳐주셨다. 고마운 마음에 물속에서 다가가 작게 물었다.
"할머니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
"네."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물었다. 할머니라는 말이 싫을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부끄러워하면서 작게 답했다.
"박. 옥. 순."
이름도 참 시대의 산물이구나. 문득 다른 할머니들의 이름도 궁금해졌다. 내 친구들 이름은 지혜, 정민이, 영아, 준희, 재용이, 준호 이런 것인데 언젠가는 촌스러운 이름이 되겠지? 로하, 서우, 태이 이런 친구들은 우리를 어르신들이라 부르고.
"학생 이름은 뭐야?"
"정. 성. 은. 이요. 그리고 저 학생 아니에요. 나이 많아요."
아차, 싶었다.
눈앞에 그녀는 70살 정도 일 텐데... 머쓱.
"윽. 죄송해요. 저 서른 넷이요."
"결혼했겠네?"
"아니요..."
"아이고! 어뜩해~?"
"그러니까 말이에요..."
우리가 대화 나누는 거 보더니 앞에 할머니도 뒤돌아 환영한다고 했다. 텃세는 모르겠고 귀엽기만 한 할머니들인걸. 다만 한 가지 의문인 건 수모의 디자인이 A 아니면 B 뿐이었다. 다들 똑같은 곳에서 샀나? 신기하네... 싶었는데 오늘 이 글을 쓰려고 검색창에 '아쿠아로빅', '텃세' 쳐보니 '정말 텃세 심한가요?' 같은 질문들이 많았고,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Re : 등록해 보세요. 할머니들 텃세가 무서운지 무릎이 무서운지. 걱정하는 거 보니 무릎은 별로 안 아프신가 봐요?
Re : 절실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주변상황은 크게 개의치 마세요
확실히 몸이 아픈 사람들이 주로 하는 운동인 듯했다.
Re : 텃세는 없었는데 끝나고 항상 우유 빵 과일 먹으며 얘기 나누는 게 불편했어요
Re : 가자마자 모자값 내라고 하는 곳 있었어요. 모자는 삼천 원도 안 할 것 같더구먼... 만오천 원 회비 내라더군요.
아! 그래서~ 할머니들 모자가 다 똑같았던 건가? 뭐가 됐든. 적어도 여기 오는 할머니들은 덜 외로워 보였다. 5천 원짜리 커피 파는 곳에선 볼 수 없었던 이들이 이곳에 모여 음료수를 나눠 먹고 있었다. 다 같이 샤워하는 시간, 샴푸를 안 가져와 옆 할머니에게 빌렸는데 자신이 커피로 만든 것이라며 미끄덩한 액체를 손에 부어주었다. 머리가 잘 감기지도 않았고, 내 몸만 너무 탱탱한 게 머쓱해 후다닥 나와버렸다. 수영장을 가본 적이 너무 오래라 뭘 가져가야 하는지도 몰랐던 나는 수건 없이 갔고, 물을 뚝뚝 흘려 혼났다. 그래, 할머니들이 많으니 미끄러우면 더 큰일이지. 내일부턴 수건을 꼭 싸와야지.
복지관을 나온 나는 친구들 단톡방에 연락해 우리의 미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운동 끝인사가 뭔 줄 알아?"
"사랑합니다?"
"미친 어떻게 앎?"
"내가 수영장 짬바가 10년이 넘어."
"정확히는 '섹시하게~ 건강하게~ 사랑합니다'야. 섹시하게~ 할 땐 야한 포즈 짓고, 건강하게~ 할 땐 건강한 표정 짓고, 사랑합니다~ 할 땐 하트 그려야 해."
"ㅋㅋㅋㅋㅋㅋ 우리도 하자!"
그렇게 성은은 거장이 되기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기 시작하며 할머니가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