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화를 통한 주관적인 디자인 리뷰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몬드리안은 사물의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 만으로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형태 및 색채를 간략하게 다듬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그는 점차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결국 '단순화를 통한 메세지 전달 효과의 확장'을 그가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세부묘사를 없애고 특정 행위나 부분에 초점을 맞춰 주어진 형상을 단순화시키다 보면 사실적인 묘사를 했을 때보다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순화가 가지는 보편성'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사진이나 사실화를 대할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형상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지의 구체성을 의식하다 보니 메세지 자체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허나 단순화된 형상을 보게 되면 어느덧 우리는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볼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만화 속의 많은 캐릭터들이 단순화되어 있고 그 캐릭터의 정신을 우리가 해방시킴으로써 그 세상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는 단순화를 통한 확장성과 보편성의 본질을 더 쉽고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픽토그램을 활용한 간단한 샘플들을 만들기로 했다.
픽토그램이란? 그림(picture)과 전보(telegram)의 합성어로, 언어를 초월해서 직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된 그래픽 심벌(symbol)을 말한다. 픽토그램은 의미하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시각화하여 사전에 교육을 받지 않고도 모든 사람이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므로 단순하고 의미가 명료해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픽토그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일반적으로 공중화장실 앞에 붙어있는 남자와 여자의 아이콘을 떠올리면 된다. 칸막이를 통한 두 아이콘의 대비가 이보다 적절히 배치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범용적이고 정적인 픽토그램은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이미지라서 단순화의 표본으로 삼기엔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동적이고 행위의 의미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걷고 있는 사람'을 주제로 작업을 진행했다.
먼저 한 장의 사진을 표본으로 정하고 색상을 제거한 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의 Image trace와 Pen tool을 사용해 복잡한 외곽 형태를 단순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걷고 있는 사람'의 본질에 불필요한 요소(근육, 의상, 외모, 소품)들은 전부 걷어내고 오로지 '걷는다'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만을 생각해서, 사람 임을 인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형 요소와 걷고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두 팔과 다리의 동작만을 남겨 두었다.
러프한 1차 시안이 완성되었다. 픽토그램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갖추어졌지만 조형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부분들이 남아 있어, 팔-다리-허리의 굴곡과 인체의 비율 등을 고려해 다시 한번 단순화 과정을 거치기로 했다.
형태적 유사성을 가져가면서 '10 X10 GRID' 위에 재배치를 시도했다. 기존의 팔, 다리에서 애매하게 느껴졌던 형태를 더욱 단순화시켰고, 신체의 각 부분 또한 일정한 각도와 간격을 가지고 모서리 위에 맞물릴 수 있도록 했다. 단순화의 단계를 정량적으로 수치화시켜 '1단계(가장 단순화된 형태)~10단계(가장 사실적인 형태)'로 나누어 봤을 때, 3 부근에는 근접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후의 작업 과정을 더욱 세밀하게 밟아 나가기 위해 나는 사랑(LOVE)이란 테마를 정해서 여러 가지 상황을 표현하기로 했다. 사랑이란 주제가 크게는 전인류애적인 사랑에서 작게는 남녀 간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겐 굉장히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쓰이는 개념이라, 픽토그램을 가지고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했다.
기존에 만들어진 픽토그램은 남자의 형상에 가깝기 때문에 여성적인 형상을 추가적으로 만들었다. 남성보다 여성이 지닌 신체적인 특징을 부각할 수 있도록 가슴과 허리의 라인을 다듬었고, 여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긴 머리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을 돕고자 말풍선 안에 관념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아이콘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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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픽토그램 결과물
동상이몽 - 同床異夢
동상이몽은 그 뜻을 풀어 쓰면 'Although they work together, they each have different purposes' .처음엔 한자보다 이해가 쉬운 영어를 사용하려 했으나 작품의 함축적인 의미를 담기엔 글줄이 길고 다소 설명적이라 부적절해 보였다. 또한 한자 그 자체가 실상 굉장히 함축된 상형문자이기에 이미지로도 볼 수 있어, 개념은 다르지만 두 가지 상징적 속성을 내포한 이미지들의 조합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한색과 난색의 색상 대비, 여성과 남성이 지닌 시각적 형태의 차이, 말풍선 안의 메타포가 가진 상징적 의미를 통해 픽토그램에 담긴 메세지의 본질을 쉽게 보여줄 수 있었다. 또한 이미지의 속성이 명확할수록 함께 쓰일 텍스트의 의미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즉 이미지의 표현이 구체적일수록 텍스트는 넓은 영역에서 추상적이고 개념적으로 쓸 수 있고 이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혼합하며 생기는 힘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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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결과물
모성애 : Mother's instinctive love
좌측의 여성 픽토그램은 40~50대 아이의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형태를 고려했고, 우측은 팔을 치켜드는 동작의 관념적 속성과 크기의 대비를 통해 어린아이를 표현했다. 치마의 형태가 젊은 여성의 실루엣과는 다르면서 어머니 고유의 속성도 담겨 있어야 했기에 표현하는데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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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결과물
미안하다, 고양이는 당신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
Sorry, but your cat really doesn't need you 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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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결과물
누군가를 기다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에 하트(Heart)라는 상징적인 메타포가 추가되면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담을 수 있었다.
아래는 조금 더 설명적인 요소가 추가된 픽토그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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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결과물
What is popular music?
'He is thinking of fortune'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이 1차원적으로 비칠 수 있어 'What is popular music?'으로 변경했다. 바꾼 제목이 이미지를 한층 더 은유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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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결과물
What do women want
기존의 픽토그램이 측면을 강조한 것이었다면 여섯 번째 결과물은 반측면의 모습을 지녔다. 평면에 입체감을 주기 위해 좌측으로 살짝 돌아서 있는 듯한 형태를 고려했고 전체적인 형태도 슬림하게 다듬었다. 또한 여성의 하반신 비율을 늘리면서 대비가 강한 색상을 선택해 외형적으로 매력적인 여성임을 암시하고자 했다. 그리고 자칫 남자의 가방이 이 상황에 불필요한 요소로 비칠 수도 있지만, 가방이라는 메타포가 지닌 평범하고 일상적인 속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현대문학은 애매하면서도 복잡한 인물관계를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굉장히 직관적이고 단순한 구조를 띄는 경향을 보인다. 단순화를 통한 이러한 보편성의 확보는 점멸하는 현대 디지털 세계의 산만함을 극복하고 '지속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로써 단순화를 통한 의미의 확보라는 몬드리안의 목표도 달성된다. 문학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소비되고 있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로 단순화된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현실이다. 픽토그램이 이미지와 텍스트의 형식을 적절히 조화시켜 하나의 통일된 언어로 발전하고 있으므로, 가장 단순화된 조형의 의미는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참고저서 :
스콧 맥클라우드 '만화의 이해' 1993, 비즈앤비즈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2002,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