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화를 통한 주관적인 디자인 리뷰
현대음악, 현대미술, 현대무용, 현대문학..
정도의 차는 있지만 모두 즉흥적인 성격을 띤다. 그래서 현대(modern)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예술 활동에서 즉흥성이란 간과해선 안될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다시 말해 예술적 기량이나 비판적 사고, 미리 계획된 작품보다 감정, 기분, 영감이 주는 요소들이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이며 직관적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관계와도 같다. 모차르트는 항상 객관적이며 필연적인 확고한 플랜을 쫓는 것같이 보이는 데 반하여, 베토벤의 음악은 모든 주제, 모든 모티프, 모든 음조가 마치 "나는 이렇게 느끼니까", "나에겐 이렇게 들리니까", "나는 이렇게 하고 싶으니까" 하고 울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또한 현대에 가장 인기 있는 작가들은 작품에 미완적인 요소를 남겨 많은 것을 암시만 하고 그치는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짐작하고 보충하게 하는 것이다. 해석의 여지가 많고 정확히 정의하기 힘든 불완전한 작품일수록 매력적이고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데, 의도했을 수도,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이런 일련의 결과들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작가의 즉흥성, 다른 말로 직관성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즉흥성이라는 개념은 그래픽 디자인에도 있을까.
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작업물에 디자이너의 가치와 직관이 담겨 있음은 당연하다. 그래픽 디자인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사회, 문화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예술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구조에서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래픽 디자인과 즉흥성의 관계' 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위 이미지는 원 하나, 점 두개, 선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것은 얼굴이라고 인식하는데, 재밌는 점은 얼굴 외에는 어떠한 사물도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에 각인된 정보들의 집합이 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종족이라서 모든 것에 자신을 투영해서 보고 의미 없는 물체에도 정체성과 감정을 부여한다. 그리고 세상을 우리 방식에 따라 재구성하는데 이러한 점이 그래픽 디자인을 하는데 있어 어떤 직관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제임스 조이스는 현재 순간에 한 사람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것, 그다음 순간에는 영원히 사라져 버릴 그것을 포착하고자 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예술활동을 하며 가지는 즉흥적인 아이디어나 직관들이 나타났다 곧 사라지는 과정의 연속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래픽 디자인에 즉흥성(직관성)이 미치는 과정을 조금이나마 기록하기 위해 아이소타입(Isotype)을 활용하고자 한다.
아이소타입(Isotype)
오스트리아 빈의 박물관장 노이라트가 1920년대에 제창한 것으로, 일정한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 문자와 숫자를 사용하는 대신에 상징적 도형이나 정해진 기호를 조합시켜 보다 시각적·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방식이다. 문자의 사용이 고도로 체계화된 현대에 등장한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이자 언어체계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에도 통계도표나 교과서 등에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표지·심벌마크의 표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기에 그래픽 디자인의 발전에 기여한 노이라트의 업적은 지대하다. *픽토그램은 이것의 하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위키피디아 참조)
아이소타입의 핵심은 실제 형상을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세부묘사를 없애면서, 특정 부분에 초점을 맞춰 가는 데 있다. 본질을 찾을 때까지 주어진 형상을 추상화시키다 보면 사실묘사를 했을 때보다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위 이미지는 원과 형태가 다른 도형들의 조합이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보고 특정한 인물이나 위인 대신, 보통의 남자를 가리키는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디자이너들은 비주얼 아이덴티티나 컨셉에 따라, 혹은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특정한 모듈을 정해놓고 전체 사인 시스템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직관이 개입된다.
나는 특정한 목적이 없기에 가장 무난한 형태의 픽토그램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얼굴을 기준으로 1:6의 의 비율을 만들고 남자와 여자의 기본적인 신체적 특징이 보일 수 있도록 간략하게 배치했다. 투박하고 기골이 장대한 '남과 여' 픽토그램 1차 시안이 완성.
특징은 드러나지만 신체 비율이나 면적 간의 균형이 맞지 않아, 조형적인 완성도가 떨어져 보인다. 그래서 전체적인 면적을 약간 줄이고 신체 아래쪽으로 갈수록 폭을 좁혀 무게중심을 찾아가자 조금씩 개선의 여지가 보였다. 이런 과정은 정량화된 정답이 없는 도안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최종 형상만 머릿속에 그려둔 채 좌우로 1px씩 당겼다가 밀어내며 위치를 잡아가는 답답한 과정이 반복된다.
여러 번 수정을 거치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추상적으로 그리던 형상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듯했다. 매번 느끼지만 작업 전에 예상했던 안과 최종적으로 나오는 결과물은 천지 차이다. 이렇게 간단한 픽토그램조차도 사전에 예측하기 힘든 건 개인적인 경험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지만, 시각적으로 확인하지 못한 디자인은 그만큼 불안정한 상태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무리를 짓기 위해 Red와 Blue 컬러를 사용해 대비를 주니 칙칙했던 픽토그램이 한결 화사해 보인다.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미궁으로 빠져서 최초의 취지는 말끔히 잊어버리고 기계적인 반복행위를 이어나가기 때문에 결론을 도출하기 어렵다. 하지만 굳이 즉흥성의 여부를 따져 본다면, 초기 도안 면적을 잡기 위해 그리드 위에 도형을 맞춰나갔던 순간을 제하곤 거의 모든 과정이 즉흥적인 판단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진 속 남자가 '가방을 들고 있다'는 정보에 초점을 두고 그 외에 불필요한 요소들(안경, 코트, 신발 등)은 전부 단순화시키기로 한다. 가방이라는 오브제가 잘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픽토그램도 정면이 아닌 반측면의 형태를 띄도록 했다.
앞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픽토그램의 전체 면적을 잡기 위해서 그리드 위에 형태를 올려두고 한 칸 한 칸 규격에 맞춰 나갔다. 각각의 신체부위를 명도로 구분 짓다 보니 작업은 간단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식상한 형태의 픽토그램이 예상되어, 톤으로 구분 짓지 않고 음각 영역을 살리기로 한다.
연결된 부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분리해주고 면과 면이 겹치는 곳은 음각으로 만들어 형태를 다듬어 나갔다. 발의 형태는 일정한 곡선을 살려 주었다가 전체 균형감을 흐리는 요소가 되어 원래대로 복구하고, 상체와 하체를 구분시켜 전체적인 면적 대비를 완화시켜 주었다.
다만 가방과 팔의 형태가 겹치면서 위쪽으로 이어지는 연결점에 어깨와 가방끈의 배치가 애매했다. 가방끈과 팔을 일직선 상에 놓으면 어깨가 그리드 바깥으로 벗어나고, 팔과 어깨를 맞추면 가방끈이 몸통 안쪽 마진을 과하게 차지해 상체가 좁아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일수록 이미지를 주의 깊게 들여다 보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만약 내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면, 적어도 문제를 구성하는 항목 중 어느 하나도 슬그머니 회피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끔 이렇게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되면 보통은 주위의 조언을 구하기도 하지만, 형태의 미세한 차이는 누구에게나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인지라 정답이 없다.
최종 결과물이 나오면 '아니, 이렇게 간단한데 왜 그렇게 헤맸을까' 싶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다른 도안에서 이 과정을 답습한다.
우리 인생의 방향은 어느 순간 예기치 않게 전환된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옷을 고르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점심을 먹고 다시 업무를 하고, 해가 질 무렵 건물을 나가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거나 티타임을 가진다. 혹은 헬스장에 가서 애꿎은 근육을 혹사시키거나. 이렇게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같은 리듬으로 반복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공허함에 '내가 뭘 좋아했지?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뭐였을까? 뭘 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밀려오는데 그때가 권태기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즉흥성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후면 다시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의 쳇바퀴에 되돌아올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계기가 될 수도 있으므로.
< 참고문헌 >
-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사회의 예술사' 창작과 비평사, 백낙청 옮김
- 스콧 맥클라우드 '만화의 이해' 1993, 비즈앤비즈, 김낙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