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훌륭한 삶은 노력하지 않는 삶이 되었다.
고통을 피하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인식이 상식이 되고, 되도록 고생하지 않는 직업(금수저나 건물주가 최고의 직업으로 손꼽히는 시대)이 최고의 직업으로 평가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누구나 연인을 만나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고 싶지, 도서관에 앉아 오랜 시간 책을 보거나 반복적인 숙달이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고 싶어 하겠는가.
나 또한 주말이면 늦잠을 자고 일어나 밥을 시켜먹고 청소를 미루며 누구를 만날지 카카오톡을 뒤적거린다. 근근이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 책이라도 보려 하면 침대 옆에 나뒹구는 기타가 눈에 띄어 시간을 허비하다가 내 등을 긁어주는 고양이와 노닥거리길 반복한다. 뒤늦게 기타와 고양이를 탓하며(절대 내 탓은 하지 않는다) 집을 빠져나와 가까운 스타벅스를 찾아 들어간다. 아메리카노 한잔 시켜놓고 공부할라치면 또다시 유튜브의 연관검색에 뜨는 자극적인 제목의 링크로 마음이 쏠린다.
영어실력을 갖춰야 하고 디자인 실력을 쌓기 위해 자기계발도 게을리 해선 안되며,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꾸준히 운동도 해야 하고 사고의 폭을 넓히기 위해 전시회나 미술관도 다녀야 하는데, '나는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까', '조금 쉬는 건 괜찮아.'라는 자기합리화의 굴레에 갇혀 이 모든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디자이너라는 사회적 위치와 나의 게으른 사유가 충돌하며 생기는 자괴감을 때때로 밖으로 표출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유 없이 다른 디자이너의 작품을 평가 절하하고 내 작품을 대단하게 여긴다거나, 정량화할 수 없는 가치들을 객관화시켜 점수를 매기려 드는 나쁜 버릇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분명 사회의 평화와 공존을 바라는데 왜 이런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생각들이 자꾸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일까;
그런데 이러한 나쁜 습관은 나뿐만 아니라 예술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도 종종 보인다.
얼마 전 서울 근교에서 진행한 디자인 세미나를 다녀왔다. 큰 행사는 아니었지만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생각과 노하우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참석했다.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차례로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을 끝마치고 짧은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대다수의 청중은 디자인의 미래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았는데, 내 뒷편에 자리했던 서너명의 사람들은 시종일관 강연내용을 꼬투리 잡아 폄하하고 오늘날 디자인업계의 부조리한 세태를 한탄하며 궁시렁거렸다. 비판을 통한 자기반성은 좋은 디자인에 도달하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지만, 선입견과 불만에 가득찬 그들의 삐뚤어진 사고방식은 문제가 있어보였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긴다.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하다 보면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남들과 다르게 인지해야 하고 기존에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러나 올바른 사고와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나만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자기기만적인 사고와 허영심의 틀에 갇혀버릴 것임은 당연하다.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여긴다거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작품을 헐뜯고 비난하며, 평범한 이들과 자신을 구분 짓기 위한 무리한 언행과 거리낌 없는 역설적 표현을 일삼는 것이다. 또한 과격한 공격적 이념을 표출하며 세속적인 사회 구조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탓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사회로부터 분리시켜 안주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별다른 노력도 없이 예술이란 허울뿐인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의 불안한 의식세계를 과도하게 표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의 대가들 중 그 누구도 안온한 삶을 누리며 대작을 낳은 경우는 없다.
피카소도, 바흐도, 아인슈타인도, 쇼팽도, 까뮈도 낭만적이고 부드러운 환경을 누린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독하게 고집 센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끊임없는 비판과 중상모략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작품 세계를 꿋꿋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치열한 집중과 열정으로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고통의 결과물을 감상하는 관람자에게도 최소한 그 고통의 과정을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결국 편안한 창작과정도 편안한 감상의 방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남의 인생을 보고 배우기보다는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면 그게 최고예요.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단 한 번만이라도 아무 불평하지 않고 무조건 열심히 살아보라는 이야기뿐이죠. 물론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렇게 한번 해보고 그것으로부터 보람을 느끼면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게 돼요. 저는 성격상 불평을 잘 안 해요. 스스로에 대한 비판은 많이 하는 편이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은 전혀 안 하죠. 왜냐하면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에요. 남이 하는 걸 보고 신경 쓰고 시기할 시간에 내가 조금이라도 발전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발레리나 강수진
< 참고문헌 >
- 에리히 프롬 '존재의 기술' 1977, 까치, 최승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