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나치게 전문화된 사회가 가진 취약성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한다.
경기가 안 좋아지자 여의도의 수많은 금융맨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고, 잘 나가는 은행의 부장들은 명퇴 후 치킨집을 차려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들이 끊이질 않는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고 인정받던 전문직 종사자들이 한순간에 실직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직종분류 사전에는 이미 2만 개 이상의 전문직종이 나와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새로운 직업들이 나타난다. 하나의 임무가 세 개의 임무로 쪼개지고, 세 개의 임무가 다시 5개의 직업으로 분류된다. 한 명이 할 일을 5명이 나누어하니 전문성은 점점 더 향상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더 적은 수의 분야에 대해 깊이 아는 전문화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한 가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나머지는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의 전문화도 이와 비슷하다. 디자이너들은 매일 전문성의 한계에 부딪힌다.
인터렉션 전문가, UI 전문가, 인체공학 전문가, GUI전문가, 프로토타입 전문가, 타이포그래피 전문가, 편집디자인 전문가, 모션그래픽 전문가, 3D 그래픽 전문가...
디자인 분야에서도 이렇게 수많은 직종으로 나뉜다. 이렇게 파생된 '디자인 기술의 전문화'는 각자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생산성을 증진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화는 개인에게 할당된 임무의 범위를 제한하고 각자 특정임무만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임무의 내용이 바뀌면 개개인은 이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회 구조가 갑자기 바뀔 확률은 현저히 낮으니 남들보다 수행할 수 있는 임무의 가짓수를 늘려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부지런히 인접한 디자인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글로벌 시대의 발 빠른 정보 습득을 위해 어학실력도 갖춰야 할 것이다. 새로 나오는 디자인 툴도 익히고, 개발자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코딩도 틈틈이 공부해야 한다. 취미활동보단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익히는 게 급선무다. 이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은 먼 미래에 성공한 내 모습을 그려봄으로써 감내해야 한다. 고통 없는 성공은 없으니.
이렇게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기존에 3명이 처리하던 일을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긴다. 임무가 바뀐다 하더라도 인접해 있는 다른 일들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세상 모든 디자이너가 실직하지 않는 한) 입에 풀칠할 시간을 조금 번 셈이다.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주위의 디자이너들과 내 가치를 견주어 보는데, 간혹 이른 나이에 성공한 이들을 보게 된다면 상실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먼 훗날의 대의을 위해 오늘도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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