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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뜻지 Apr 22. 2020

반딧불이의 묘 (火垂るの 墓)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춰둔, 그래서 더욱 위험한 반미영화


‘반딧불이의 묘’는 노사카 아키유키의 동명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원작자는 자신이 어렸을 때 겪은 전쟁에 대한 기억-실제 자신의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이 소설을 집필하였다.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는 세계 제2차 대전 중 미군의 공습으로 14살 오빠, 4살 여동생의 어린 두 남매가 부모를 잃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다 결국엔 죽음을 맞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에 살았던 세이타와 세츠코 두 남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는 1945년 9월 21일, 세이타의 독백으로 세이타의 죽음을 이미 명시하고 과거로 돌아간다. 1945년 6월 5일, 고베 공습이 일어나 어머니와 남매는 각각 피난을 가게 된다. 공습의 피해로 어머니가 죽고 군인인 아버지의 죽음도 알게 된다. 배고픔에 허덕이다 세츠코마저 죽게 되고 세이타도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영화는 약 3개월의 시간을 그려내고 있다.




'반딧불이의 묘' 이야기를 설명하는 소재들


반딧불

반딧불은 영화를 대표하는 소재로,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빛이라기보다는 전쟁터에서 다음날이면 죽게 될 운명인 비극적 현실의 주인공을 대변한다. 반딧불은 환하게 빛을 발하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 곤충이다. 이러한 반딧불의 특성은 주인공인 세이타, 세츠코 남매와 연관된다. 빛을 발하다 금방 죽어 버리는 반딧불이의 모습은 비참한 전쟁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결국 덧없이 죽어간 두 남매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리고 엄마의 유골함 주위로 반딧불 두 마리가 날아가는 장면에서는 남매의 죽음을 암시한다. 그러한 반딧불의 특성을 더 넓게 확장하자면 결국 전쟁에 의해 죽은 그 모든 희생자들로 볼 수도 있다.



반딧불이의 묘(火垂るの 墓)를 일본어로 읽으면 '호타루노 하카'가 되는데, ‘호타루’라는 단어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호타루는 ‘반딧불이 형’ 자와 발음이 같지만, 여기에서는 ‘반딧불이 형’ 자가 아닌, ‘불 화’ 자에 '영혼 영’ 자의 한자로 쓰였다. 이것은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의 영혼이 붉게 형상화되어 반딧불이를 떠올리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묘’라는 말은 영화에 어두운 느낌을 부여하고, 세이타 남매의 죽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사탕

 영화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사탕이다. 영화 시작 장면에서 한 역무원이 사탕 통을 던지며 주인공 세이타의 과거로 이야기를 전환시킨다. 마을이 피격을 받게 되고, 대피하는 과정에서 세이타와 세츠코를 포함한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세이타 남매의 어머니가 사망하게 되어 세이타는 자신의 여동생 세츠코와 함께 남은 생활을 헤쳐나가야 한다. 세이타는 공습으로 불에 타버린 집에 다시 찾아가서 피난을 가기 전 마당에 묻어놓았던 항아리에서 사탕 통을 찾아내게 된다. 이것은 힘든 상황에서 잠시나만 잊고 있던 행복을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탕은 반딧불과 더불어 세이타 남매에게 전쟁을 헤쳐 나가는 희망이며, 전쟁 이전의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볼 수도 있다. 음식도 충분치 않고 공습을 피해 힘들게 도망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달콤한 사탕은 어린 세츠코가 웃음을 짓게 하지만, 통에 가득했던 사탕은 하나둘씩 다 떨어져 버리고 세츠코의 웃음도 조금씩 사라져 간다. 결국 사탕이 다 떨어지고 세츠코는 영양실조에 걸리게 된다. 영양실조로 앓아누운 세츠코는 행복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탕 대신 유리구슬을 사탕이라고 생각하며 빨았다. 결국 사탕은 세츠코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소재로도 볼 수 있다. 하나둘씩 떨어져 가는 사탕과 영양실조로 기운을 잃어가는 세츠코의 모습이 유사성을 띄고 있다. 즉, 사탕은 세츠코에게 잠시나마 행복을 주는 소재임과 동시에 세츠코의 소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소재이기도 하다.    


공습

미군의 공습은 평화롭던 마을을 불태우고,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에게 힘든 시간을 갖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공습으로 인해 집이 타버리고 어머니도 잃어 두 남매는 갈 곳을 잃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그들의 삶을 어렵게 하여 인간의 개인적인 단면을 드러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공습은 세이타가 음식을 훔쳐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세이타가 다시 폭격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본에서 한자표기로 ‘반딧불이 형’ 자 대신 ‘불 화’ 자와 ‘드리울 수’ 자를 썼는데, 따라서 호타루는 반딧불이라는 뜻도 되지만 ‘불이 떨어지다’라는 의미로 공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붉음과 푸름, 그리고 교차된 장면

 이 영화에서는 유독 대조되며 두드러지는 상징물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붉음 푸름이다.

먼저, 푸른 물은 생명의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세이타가 공습의 폐허 속에서 수도관에서 터져 나온 물로 몸을 씻는 장면부터 바닷가와 논바닥의 물, 그들이 기거하는 호수 등 남매의 힘든 시절에 웃음을 주는 장소는 모두 물이 있는 곳으로 푸른 물의 이미지를 통해 긍정적이고 화목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푸름과 대조되는 붉음은 주로 비극적이고 죽음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남매의 불행의 원인이라 볼 수 있는 공습도 시뻘겋게 치솟아 오르는 화염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어머니와 세츠코의 화장, 그 외에 영혼이 된 세이타가 회상하는 장면 또한 붉은빛으로 나타난다.

 또한 전체적으로 행복한 장면과 불행한 장면을 교차시킴으로써 비극을 심화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 어머니가 폭격에 의해 부상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불행의 장면에 이어서 여분의 음식과 생필품을 찾아 기뻐하는 세이타의 모습, 세츠코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세이타의 모습을 통해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을 팔게 되는 남매의 불행과 쌀이 생겼을 때의 잠시의 행복, 하지만 곧 매정한 아주머니에게 구박을 받게 되는 불행의 모습을 교차시켰다. 결국 친척집을 나와 엄마의 유품으로 단 둘이서 살며 잠시간의 행복을 느끼지만 곧 먹을 것이 떨어지고 동생이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되기까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반딧불의 묘는 행복한 순간과 불행한 순간의 장면을 교차시켜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불행을 더욱 심화시키고 비극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영화 '반딧불이의 묘' 주인공 - 세이타, 세츠코 남매



영화의 메시지, 감독의 목소리

전쟁 중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들


 감독은 세이타, 세츠코 남매가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전쟁 중에 더욱 극명해지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을 비판하였고, 한편으로는 전쟁 속에서는 민중이건 아이들이건 누구나가 피해자로 대변될 수 있다는 점도 나타내고자 하였다.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 게다가 전쟁고아들을 주인공으로 택함으로써 전쟁의 비극성과 비참함이 강조된다. 사회적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세츠코를 살리고자 하는 것은 세이타뿐이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세츠코는 죽음을 맞게 되고 이를 통해 전쟁의 비참함이 심화된다. 또한, 단순히 어린이 두 명이 아니라 남매를 주인공으로 택함으로써 감독은 가족의 중요성과 유대감을 강조하고 있다. 세이타 자신도 아직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생 세츠코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끝까지 동생을 지키려 한다. 이를 통해 전쟁의 잔인한 상황 속에서도 가족 간의 유대감이 중요한 가치임이 드러난다.


세츠코와 세이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전쟁도 굶주림도 아니었다. 일본인의 개인주의와 무관심 때문이다. 만일 의술을 인술로 생각하는 의사라면,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에게 충분한 영양을 섭취시키라는 말 대신 영양제 한 대라도 무료로 처방해 주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의료기술자로서의 직업상의 업무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아이들을 구박하는 친척 아주머니, 굶어서 죽어 가는 동생을 위해 도둑질한 어린 오빠를 짐승처럼 구타하는 이웃 주민, 이들은 모두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감독 의도대로 현대에도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사람들 때문에 희생되고 있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경각심을 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는 장면은 20년 전에 죽어 간 아이들, 이 아이들의 존재는 구시대의 망령이라기보다는 전쟁과 분리된 현시점에도 엄연히 세츠코와 세이타처럼 비정함과 무책임에 의해 희생당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장치로 쓰이고 있다. 즉,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함,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로 해석된다.



군국주의

영화에서 감독은 우익에 가까운 소설가의 작품을 선택하여 이를 내용 변화는 거의 없이 영화로 옮겼다. 그래서인지 영화와 소설 속 주인공인 세이타는 군인 가족의 아이로서 부모의 영향으로 군국주의에 물든 캐릭터로 나왔고, 이로 인해서 대일본제국이 질 리가 없다는 등 군국주의에 대한 내용과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부모를 잃는 등 미군에 의해 일어난 결과인 듯 보여주는 반미주의에 대한 내용이 더욱 강조, 감독에 의도였던 내용과는 다르게 이와 같은 점이 강조되는 결과물이 나왔다. 또한 일본 장교 집안 아이들의 죽음을 소재로 한 것에 대해서도 논의를 할 수 있다. 그 당시 일본에서 군인은 그야말로 나라에 온 몸을 바친 일종의 영웅이었다. 그런데 그런 영웅의 아이들이 죽어간 것을 보여줌으로써 일본 국민들이 더욱 애잔함을 느끼는 효과가 발생했을 것이다. 당시 상류계층이던 세이타의 가정이 전쟁과 공습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몰락하고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이 영화는 군국주의를 그려낸 영화인가

※ 반전영화인가

※ 반딧불이 나타내는 대상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


 역사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본다면,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전쟁으로 인한 불쌍한 아이들의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 세이타 남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고아 남매를 돕지 않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만 걱정하는 친척 아주머니와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돕지 않고 무관심하게 대응하는 의사, 농부 그리고 공무원의 모습은 관객에게 분노를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범국으로서의 일본이 이 영화의 장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휴머니즘적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전쟁을 일으킨 것이 일본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에서는 미군의 일방적인 폭격으로 희생되는 일본 국민의 모습만 그려냈다. 영화의 제목인 ‘반딧불이의 묘’에서 전쟁으로 희생된 일본의 민간인과 군인을 모두 반딧불이로 상징하고 그들의 묘에 대해 말하고자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주인공이었던 세이타, 세츠코 남매와 어머니 그리고 해군 장교인 아버지까지 모두 미군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철저히 미군은 가해자이고 일본은 피해자라는 구조로 서술되었다. 처음엔 감독의 의도대로 개인주의와 무관심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메시지에 집중하고자 했으나, 이 영화는 그렇게 단순한 구조로 파악할 수 없는 영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딧불이의 묘'는 슬프도록 아름답고 순수한 영상에 감춰둔, 그래서 더욱 위험한 일본의 반미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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