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의 평가
엄마의 버건디색 소파에 기다랗게 누워 자다가 허리가 아프면 일어난다. 조용한 부엌 식탁 위에 엄마가 쪄둔 달콤한 고구마 한 개를 까먹고 나서 어느 계절이고 꽃이 피어있는 엄마의 베란다 화단을 들여다본다.
엄마가 없어도 엄마가 있는 것처럼.
머릿속 그려지는 이상적인 친정은 그런 곳이다.
맥락 없는 글 한 줄을 툭 쓰고, 사진을 와르르 올리는 공간이 있다. 블로그 대문과 댓글을 마음대로 열었다 닫았다 하며 어떤 글은 누구도 읽지 않지만 섭섭하기는커녕 아무렇지 않다.
무엇을 해도 괜찮은 친정처럼..
20년이 넘도록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블로그는 그런 곳이다.
블로그에서 내가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평가를 해준다고 했다.
활동은 봄에 가장 활발했고, 주로 오전 11시에 글을 작성했다고 나왔다.
내가 사랑한 게시글은 <작별하지 않는다> 독서일기였고, 사람들은 2024년 여름에 올린 <오이 딜 피클> 만드는 법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나를 요리 블로거로 볼 수도 있겠다. 재밌군.
하지만 지난해의 어느 분석으로도 비누 이야기가 안 나온 것은 놀라웠다. 서둘러 휴대폰 앨범을 열어보니 비누 사진과 동영상이 스크롤을 한참 해야 나왔다.
열여섯 살 강아지 비누는 뿌연 눈으로 얼마나 보이는지 가늠도 안 되는 좁은 시야에 나를 맞추려 애쓰며 간절히 쳐다본다. 그런데 열렬한 사랑이 한쪽에서만 자신도 모른 채 식고 있다니 아주 의리 없는 짓이다.
재밌게 읽던 마음이 조금 우울해졌지만 읽기를 계속한다. 마지막에 다음 해에 하고 싶은 일을 쓰라고 한다.
'나는 앞으로 무얼 하고 싶은가?'
엄마가 돌아가신 후 친정이 없어지고 나니 두 발이 공중에 둥둥 뜬것처럼 생각되고 삶의 의미가 없었다. 무기력하게 누워있어 온통 신경을 곤두서게 했던 엄마가 저기 어디에 그냥 누워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엄마대신 무기력해진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없어진 지 이미 여러 해를 지나고 있는데 뭔가 써야 하는 난이 있으니 고민이 되어 일단 덮어둔다. 다음 기회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으니 그럼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돌아보기로 한다.
지난 1년은 대부분 나를 소모하는데 할애했다. 대단한 애국자도 아니면서 여러 국가적 혼란스러운 일들에 대해 화를 냈다. 이상하게도 화는 또 다른 화를 부르고, 화의 목적을 잃은 의미 속에 파묻혀 생각과 감정을 있는 대로 쓰고 말았다.
속이 텅 빈 강정이 되어가는 동안 빈 속에 끊었던 술을 털어 넣었을 뿐 나를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어 보인다. 사실 삶의 의미가 없던 차에 핑계가 잘 생긴 것이기도 했다. 이대로 완전히 망가져 스러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내 속이 배달앱의 장바구니처럼 "텅!" 소리가 날 정도로 속이 비었으니 글이 안 써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걸 다른데서 원인을 찾느라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만일 1년의 평가가 마음속까지 들여다봤다면 빛의 속도까지 가속력을 붙이며 달려가 12월에 완전 소진이 목표인 것으로 나왔을 테다. 극단적인 생각은 내가 완전히 소멸되기 직전이라는 것에 이르렀다.
어디선가 경종이 울린다.
이렇게는 안된다. 진정하자. 아직 완전히 소멸하긴엔 이르다고..
12월 첫추위에 한번 놀란 이후 심심풀이로 시작한 한 해 평가에 또 한 번 정신이 번쩍 든다.
소멸의 반대는 소멸하지 않기인가?
소비. 소모. 의 반대어가 무언지 잘 생각나지 않으니 국어사전을 찾아본다.
생산. 축적. 은 너무 비장해 보인다. 소싯적에 느낀 거지만 나는 그 능력이 시원치 않다.
그렇다면 채움.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주 마음에 드는 내게 어울리는 단어를 찾았다.
조급해 말고 여유를 가지고 내년은 채움의 해가 되면 알맞겠다.
열심히 일한 자에게 주어지는 안식년이 참 부러웠다. 오래전 내가 살던 곳엔 교수님과 의사 선생님, 군인장교까지 안식년을 보내러 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마지막 1분 1초까지 꽉꽉 즐거움을 채우고 돌아가는 모습이 1분 1초를 열심히 산 사람이라는 확인 도장처럼 여겨졌다.
전업 주부의 삶이 열심히 살지 않은 순간이 없었을 텐데도 안식년을 가질 자격을 증명할 수도 없고,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최소한 그때 가진 내 생각과 주변의 생각들이 그랬다.
어느 날 친구 제니가 자신은 2년에 한 번 한 달 동안 휴식기를 가지기 위해 어디론가 혼자 떠나는데 그것이 내년이라고 했다. 그날 얘기를 들은 한국, 일본, 필리핀 친구들은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남편 없이 혼자서?" "애들은 누가 돌봐?" "파트타임 일은?"
제니는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 후 반드시 지키는 부부의 규칙이라고 했다. 그들 사이에 아이 셋을 두었는데 평소 대부분의 시간을 제니가 아이를 돌보며 재택 근무하는 일로 바꾸어 조금씩 하는 대신 남편이 경제력을 맡고 있었다. 아무튼 아이가 셋이라는 것이 규칙을 바꿔야 할 이유가 안된다고 했다. 남편은 그 기간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시간만큼만 일하고, 아이들을 돌본다고 했다. 오래된 작은 집에 사는 평범한 중산층인 그들은 수입이 줄어드는 제니의 휴식 기간을 위해 아끼고 경제적인 생활을 한다고 했다. 나중에 제니의 남편에게 물었을 때 아내의 충분한 휴식으로부터 그들 가정이 잘 지낼 수 있는 원동력이 만들어진다고 하며 무엇보다 소중한 건 부부의 함께 또는 각자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났고, 단 일주일이라도 휴식기를 갖겠다는 야심 찬 목표가 내게 생기게 됐다. 그러나 어설프게 남편에게 전달한 말은 일주일쯤 서로 말을 하지 않는 부부싸움만 일으킨 해프닝으로 끝났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겐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 제니부부의 규칙이 떠오른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뚜렷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삶일지라도 누구나에겐 자신만을 위한 쉼. 안식년이 필요하다. 쉼은 삶의 동력이 된다. 교수님이나 의사 선생님이 아니어도 삶을 살아가는 모두는 그걸 누릴 자격과 이유가 충분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매 순간 열심을 다해야 가능한 일이며 무척이나 고단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쉼은 무엇인가?
나는 생활방식이 다른 미국인이 아니다. 게다가 여러 이유로 나가는 것이 힘들고, 세탁된 옷에 남은 흐릿한 한 점의 얼룩에 스트레스를 받는 나 같은 사람이 꼭 집밖으로 뛰쳐나가고 집안일에서 자유로워져야만 휴식인 것일까?
쉼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깨끗해진 세탁물을 반듯하게 접는다.
뽀득뽀득하게 닦은 그릇에 맛있는 음식을 담는다.
반짝이는 세면대와 욕실. 때에 맞춰 분갈이를 한 튼튼한 초록 식물들.
햇빛 드는 곳에서 편히 잠든 비누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독서를 원할 때 멈추고, 시작된 글을 끝까지 쓴다.
나는 그런 일들에서 기쁨을 느낀다. 다만 강박을 느끼지 않는 행복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아주 많다.
쉼은 자유롭고 마음이 편해야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내게 필요한 쉼은 여유를 찾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 올 한 해는 여유를 누리는 나의 안식년을 가지기로 마음을 먹는다.
며칠 만에 한해의 평가지를 열어 소망을 적어 넣는다.
"2026년은 채움의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해의 평가가 마무리 됐다.
채움 (쉼)
하나, 타인의 글로 나를 채우자.
하나, 내 글로 누군가를 채우자.
그리고 또 하나, 하루 아니 1초의 비누와 추억도 채우자.
* 중요한 것은 반드시 여유로울 것! *
내가 정의해 둔 친정은 지친 나를 망나니처럼 마음대로 하게 두는 힐링과 비뚤어진 나를 따끔하게 교화를 해주는 곳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친정은 골치가 아프고, 각종 문제와 트라우마가 발생된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현실 세계에 친정이 존재하지 않지만 다행히 스무 살을 훌쩍 넘은 블로그는 내게 친정 같은 공간이 되어주니 고마운 생각이 든다.
브런치는 항상 맛있는 동치미를 주시지만 어려운 시댁 같다. 철없이 꿈 많은 새댁처럼 간혹 등짝을 때려주는 친정처럼 브런치 공간이 편해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친정의 효능은 언제나 만점이다.
조금 더 동그래졌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