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오랜만에 깨어있는 깜깜한 새벽.
오늘은 꼭 발행하고자 다짐을 하고 글 하나를 작성하고 보니 짧은 글을 쓰는 매거진 <오늘 느낌>으로 발행하기에 글이 너무 길다. 가지를 치고 잎도 떼어내고 그러다 보니 꽃까지 떼어내기 직전인데도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피워낸 꽃을 떼어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한편 오랜만에 써진 긴 글이 반갑기도 했다.
몇 달 전부터 글쓰기를 미루는 버릇이 생겼는데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참이었다. 글 하나가 써진 김에 긴장감을 주고자 새 연재북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절차를 시작했다.
1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서랍 속에서 <동그라미>를 만났다.
<동그라미>는 올 초에 구상했던 것인데 써 둔 초안들을 모아 여나무개쯤 제목까지 적어두고서 연재를 시작하지 못했다. 삭제하지 않고 남겨둔 제목들은 잔뜩 힘이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그때 그 <동그라미>에 무엇을 담으려 했는지 낯설기만 하다.
어쩌면 그사이 모난 곳에 정을 맞아 조금 더 동그래졌거나 모양이 변해 제목들이 생뚱맞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글 목록을 지워버리고, 연재북 제목도 <살다 보니 동그라미>로 바꿨다.
브런치 북의 주소도 정해준다. meanwhilecircle.. 그사이 동그라미..
(그사이를 넣을까? 자꾸 이름을 넣으면 간질거릴 수도 있으니 그만!)
목록 제목으로 걸어둔 동그라미들은 글이 동그랗게 변하면 제목으로 변신하기로 규칙을 정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작문반을 선택했다. 엄마의 도움 없이 최초로 혼자 결정한 선택이었다.
수업의 마지막 날에 내가 쓴 글을 남들 앞에서 읽어야 하는 복병이 있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점점 뻔뻔해지며 학창 시절 내내 특별활동은 지원자가 없어 가위바위보가 필요 없는 작문반을 선택했다. 아무리 팔을 당기고 졸라봐도 친한 친구는 작문반을 함께 선택하진 않았다. 종일 책을 들여다보면서 특별활동마저도 글을 보고 싶진 않다고 했다. 작문반에선 새 친구가 생기지 않았으나 여러 시간 매만진 한편, 한 편의 글이 친구로 남는 낯선 경험을 하게 됐다. 그것이 출간의 기쁨 같은 것일까?
작문반 선생님은 반복되는 말을 쓰지 말라고만 가르쳐 주셨는데 조사 하나, 어미 하나를 바꾸는 과정에서 희열 같은 게 느껴졌다. 그리고 거의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 완성된 글을 보면 그냥 사는 이(그사이)에게 넌 그냥 사는 게 아니라고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줬다. 이후 삶을 살아오는 내내 글쓰기는 나를 동그랗게 만드는 의식이 되었다.
지금은 글을 완성시키는 과정을 퇴고라는 고급진 말로 붙이지만 모난 돌을 정과 망치로 수없이 때려 매끄럽게 만드는 역동적인 작업과 다를 바가 없다. 때때로 과격하고 때때로 정교한 작업들을 해야 한다.
결국 가장 마음에 드는 동그라미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과도 매한가지다.
다만 그 모양이라는 것이 유형의 돌을 동그랗게 만드는 것과 조금 다르다.
사람 마음에 생기는 무형의 동그라미는 매끄러운 네모모양 동그라미. 반짝이는 세모모양 동그라미. 반들 하지만 홈이 파인 동그라미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어도 세월과 공들인 사람의 동그라미는 아름답다.
어느 수학자에게 무참히 깨질 수도 있으나 나는 반드시 원형을 이루어야만 동그라미라는 증명에 반박을 해보기로 한다.
꿈꾼다면
특별한 동그라미가 탄생한다.
조금 다르다고 해서
동그라미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동그란 줄 알고 살아가며 왜 저렇게 남들은 동그라미가 아닌지 탓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세상 뾰족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동그라미를 꿈꾸는 뾰족이였던 거다.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를 할 때 결과가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유형이 나오기도 한다고 한다. 내가 동그란 줄 알았던 것은 마치 그런 것이었다.
조금 뭉툭해졌지만 동그랗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여전히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동그라미를 꿈꾸고 있으니 희망적이다.
원형의 모양을 부정하고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 놓여있는 주변의 예쁜 동그라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런저런 인생 동그라미가 있을 뿐 정답의 동그라미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완성해야 하는 지정된 시간제한이 없다고 생각하니 여유로운 자신감이 생긴다.
언젠지 모를 그 기한에 도달했을 때 "재밌는 동그라미 만들기였어." 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더 동그래지겠지.
아, 생각났다.
지난봄 <동그라미>엔 완전한 동그라미에 대해 쓰려고 했었다. 내가 완성된 똥그라미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이미 완성된 똥그라미라고 생각했을 때 행복하지 않았다. 이제 글이 왜 안 써졌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긴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동그라미가 아님을 내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동그라미>는 여전히 내가 동그랗게 연마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사실은 지금까지 쓰던 이야기와 비슷할 수도 있지만 마음 가짐을 달리 하니 마음이 한층 가볍다.
모났던 부분을 기억하고, 다시 보고 또 만지며 글을 쓰는 것은 섬세한 마지막 작업이라 여겨진다. 어제 작성된 글을 뒤로 두고 프롤로그 글을 쓰다 보니 오늘 조금 더 동그랗게 된 느낌이다.
동그라미가 되고 싶은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뾰족한 부분을 다독거리며 살기로 한다.
뜬금없지만 어느 날에 아삭하고 풍미 있는 맛을 좌우하는 무게가 딱 알맞은 오이지 누름돌이 되고 싶다. 살다 보면 반들반들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지녔지만 단단했던 외할머니의 오이지 누름돌을 꼭 닮은 동그라미가 되면 좋겠다.
나만 동그란 줄 알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다른 동그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