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이는 의심할 것도 없이 재능이 있는 아이다.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남다른지는 다른 아이들 틈에 끼여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다. 마을에서 여태껏 그런 인물이 배출된 적은 없었다. 진지한 눈망울과 영리해 보이는 이마, 그리고 단정한 걸음걸이를 이 소년이 도대체 어디서 물려받았는지 신만이 알리라.」 -9쪽-
위의 아이가 당신의 아이라면 어떻게 키우겠는가? 당신은 중산층으로서 그렇게 비루하지는 않지만 자식을 통해서 한층 더 나은 계층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스 기벤라트의 아버지는 여러 해 전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고, 한스를 아버지가 혼자서 키우고 있다. 한스는 아버지, 마을 사람들, 교회 목사, 학교 선생과 교장 등 모든 사람의 기대와 희망을 받고 있다. 어느 누구도 한스가 잘못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스에게는 정규 학교 교육 이외에 수업 후 저녁 늦게까지 개인 교습이 이루어진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법과 문체론, 산수와 암기, 그리고 쉬지 않고 쫓기듯 공부한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일, 수영과 낚시도 금지당한다. 오직 라틴어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유년시절의 즐거움을 반납한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목사로서의 길이 열린다. 아버지의 자랑이고 마을과 학교의 자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른들만의 욕심이라고 할 수 없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한 한스의 성공에 대한 욕구이기도 하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헤르만 헤세는 목사가 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며 교육을 받았고, 신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부모과 선생, 어른들의 기대라는 수레바퀴 아래서 살아가는 한스는 헤세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지 않은가? 어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아이들과 너무나 닮아 있다.
한스가 신학교에 2등으로 합격을 했다. 한스에게 신학교 합격 후 잠시 잠깐 휴식 시간과 산책, 어릴 때 금지되었던 낚시가 허락된다. 그러나 더 나은 네가 되라는 요구가 이어진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라는 선생들의 바람이 실렸다.
“네가 거기서 겪게 될 새로운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신약성서의 그리스어를 배우는 걸 거야. 그걸 배우면 네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될 테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만큼이나 기쁨도 커지는 법이란다. 처음엔 언어를 익힌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그건 세련된 그리스어가 아니라, 새로운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특수 어법이란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히브리어도 처음에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될 거야. 그리스어를 한번 배워둘 생각이라면, 이번 방학에 조금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니. 그럼 신학교에 가서는 다른 걸 할 수 있는 시간과 의욕이 남게 되는 거지......” -63쪽-
마치 우리네 부모와 선생 같다. 최고의 우등생이 되라며 걸음마도 떼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영재교육을 시작한다. 나도 이제 겨우 눈을 뜨는 누워있는 아이를 두고 뭔가를 보여주고 들려주었다. 조금 이르게 말문이 터진 아이가 천재라도 되는 양 책을 보여주며 영재교육이라도 해보겠다며 열성을 부렸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말한다. 중고등학교 때는 대학교만 가면, 대학에 가면 취업만 되면, 취업만 하면, 승진하면 그때 쉬어가도 된다고 한다. 아이들이 무엇이 왜 되어야 하는지, 왜 그곳에 가야 하는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어른들의 격려와 질책은 아이들을 숨 가쁘게 채찍질한다. 학습에 방해가 되는 아이들과는 놀지 못하게 하며 사랑에 눈도 뜨지 못하게 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즐기며 휴식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느끼지 못하도록 몰아붙인다. 아이들은 행여나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고조된 학습의욕과 경쟁심, 성공과 성취에 대한 강한 자존심으로 야망을 키워간다.
요즘 방학이라 집집마다 아이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방학이 2주가 넘었으니 아이들은 지겨워질 법도 하건만 일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엄마 눈에). 밤낮없이 학원과 학교, 성적과 입시라는 압박감에서 이제 겨우 벗어난 아이에게도 마음을 조리며 째려보며 눈을 흘긴다. 아이들에게는 휴식일지 모르지만, 엄마는 낮과 밤이 바뀌어서 지내는 아이들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생활 습관이 너무 엉망이라는 둥, 밥은 제때에 먹어야 한다는 둥, 방학 때는 의미 있는 일을 하나라도 해보자는 둥, 아이들을 닦달하는 엄마의 속이 터진다(지금 내 속이 그렇다).
아이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뭔가에 쫓기듯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의 충분한 휴식을 방해한다. 어느 정도가 충분한지 몰라서, 아니면 아이들이 생각한 충분한 휴식과 엄마가 생각하는 휴식의 차이 때문에 혹은 엄마의 알 수 없는 불안 때문에. 방학 때만이라도 실컷 늦잠을 자고, 지칠 줄 모르고 친구들과 뛰어놀고, 방구석에서 뒹굴뒹굴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공부에 매진했지만 제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수레바퀴를 끌고 가는 한스처럼 우리 아이들도 수레바퀴 아래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한스는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서 생을 마감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시작으로 인문고전 독서를 시작합니다. 몇 해 전 욕심으로 애들도 읽히고 나도 읽으려고 샀는데 몇 권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올해부터 세계문학시리즈(민음사) 도서 100권을 다 읽을 때까지 시도하려 합니다. 서평도 일주일에 한 번은 올리겠습니다. 가능하면 화요일이나 수요일에는 업로드를 하려고 하는데 읽는 속도와 이해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은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