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연 68세, 1955년에 태어나셨습니다. 625 전쟁 직후인 전쟁의 폐허 속에 태어난 것입니다.
전쟁으로 나라는 가난했습니다. 나라가 가난하니 집안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부모님은 죽어라고 농사를 지어도 늘 돈은 부족했습니다. 우리나라 장남들이 그러하듯 오빠도 부모님을 대신해 돈을 벌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제가 큰오빠를 기억하는 때는 국민(초등) 학교 저학년 때입니다. 1970년대입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후 유신체제하에 있었습니다. 경제개발 경제부흥으로 나라가 들썩이던 때입니다. 수로와 지붕개량사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시골도 하천 공사를 크게 벌였고, 초가지붕을 헐고 스레트 지붕으로 바뀌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독일 광부와 간호사로 파견되었습니다. 또 일부 젊은이들은 베트남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나라의 가난과 집안의 가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국민들의 피땀 어린 투쟁이 있던 시기입니다.
당시 20대였던 큰오빠는 대학을 졸업하고 원양어선을 탔습니다. 멀리 파푸아누기니까지 가는 원양어선이었습니다. 어린 저로서는 그곳이 어느 만큼 먼 곳인지 몰랐습니다. 우리와 다른 모습을 한 아프리카 원주민과 오빠가 찍은 사진을 보며 재미있어할 뿐이었습니다. 원양어선을 타면 꽤 큰돈을 벌었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는 동생들 뒷바라지와 부족한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당시를 기억하는 오빠말씀에 의하면 "배를 그만 타고 싶은데, 집에 돌아와 보면 돈이 한 푼도 없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했어."라고 합니다. 동생들이 많으니 아무리 돈을 벌어도 더 많은 돈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오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오빠는 이삼 년에 한 번씩 귀국을 했는데 그런 날이면 우리 집 잔칫날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가족 축제를 벌였고, 동네잔치를 했습니다. 오빠의 바닷생활과 아프리카의 생활 등 무용담을 들었고, 가족들은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장기자랑도 했습니다. 오빠 덕분에 커피와 프림, 초코파이, 마른오징어를 처음 맛보았습니다. 달달한 초코파이와 씁쓸한 커피, 부드러운 프림을 손으로 집어먹으며 이국의 맛을 알았고, 질겅질겅 마른오징어를 씹으며 바다 내음을 느꼈습니다.
큰오빠가 집에 머무는 동안 저에게 장난을 많이 쳤습니다. 어린 저를 놀려먹는 재미가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기야 오빠들이 여동생 골려먹는 재미가 쏠쏠하지요. 다른 오빠들도 저를 꽤 놀렸거든요. 그게 오빠들의 여동생 사랑법인 것 같아요.
큰오빠는 턱수염을 파르라니 깎고는 저를 안고 제 볼에 비볐습니다. 수염의 까끌거림이 어찌나 따갑던지요. 기겁하는 나를 보며 오빠는 크게 웃었습니다. 또 한 번은 오빠가 음료수라고 건넨 빨간 포도주를 먹고 기겁했습니다. 오만상을 찌푸리는 저를 보며 어찌나 신나 하시던지요. 스무 살이 넘은 오빠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동생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
결혼 이후에는 원양어선을 타지 않았습니다. 돈 한 푼 없이 신접살림을 차린 오빠는 얼마간은 시골집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부모님은 오빠가 번돈으로 전주에 집 한 채를 마련했었는데 그 집을 팔아서 서울에 오막살이 집을 마련했습니다. 방한칸에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빚을 내어 채소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채소장사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오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채소를 떼다가 팔고 남으면 채소가 금방 썩고 문드러져. 비라도 내리고 나면 채소가 처치 곤란해지지."
오빠가 오락실을 운영했던 때도 있습니다. 오락실을 기억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오락실은 초창기(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꽤 흥행했습니다. 학생들이 오락실에서 보내느라 학교도 빠진다고 사회적으로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운영하는 오락실은 꽤 잘됐고, 점점 넓은 곳에 차렸습니다. 동생들이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철물건재 사업을 했습니다. 철물건재 사업은 잘 됐습니다. 그러나 외상으로 물건을 대는 일이 많았고, 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업자들도 많아서 쉽지는 않았습니다.
오빠는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좀 쉬면서 일하라고 말하면 "일요일에 가게 문만 열어놓고 있어도 30만 원을 버는데 나가봐야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돈 버는 재미가 있었는지 쉴 줄을 모르는 것인지 오빠는 매일 일을 했습니다.
결혼해서도 집안의 경제사정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오빠는 부모님이 동생들 대학 등록금 보내라고 하면 척척 내놓았습니다. 물론 부모님도 오빠가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하면 전답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기는 했습니다. 어쨌든 오빠는 결혼해서도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10여 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 오빠가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수술 후 며칠을 중환자실에 의식 없이 누워 있었습니다. 의식을 되찾은 오빠는 장애가 남았습니다. 좌측 편마비가 와서 혼자서 걸을 수는 있으나 손으로 쥘 수는 없었습니다. 불안정한 걸음걸이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얼굴에도 편마비가 있어서 씹고 삼키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손이고 몸이고 내 맘대로 안 움직여진다."라고 허탈한 미소를 짓는 입가에서는 침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병원을 오가며 재활치료를 했지만 손상된 신경은 돌아오지 않았고, 병세는 조금씩 악화되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에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시골집에 가고 싶다. 우리 언제 모이느냐. 보고 싶다."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코로나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시골집도 가고, 보고 싶은 동생들도 볼 수 있을 텐데 코로나로 모든 것이 막혔습니다. 병문안도 할 수 없었고, 일 년에 한두 번씩 이루 졌던 가족모임이 사라졌습니다. 오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단절된 시간을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견뎌야 했습니다.
코로나에 감염되면서 오빠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설사가 심했고, 몇 달을 먹지 못하니 살이 빠지고 앙상한 뼈만 남았습니다. 어느 날 가족카톡방에 올라온 오빠 사진은 등치 좋았던 예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코로나 3년 동안 오빠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워진 후에야 오빠를 찾았을 때는 악액질(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였습니다. 보기도 딱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오빠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식사도 제법 하셨습니다. 시골집에서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몸이 좋아지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가게에서 일하고 싶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제는 한 줌의 재로 돌아갔습니다.
쉼 없이 달리기만 한 오빠의 인생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눈물이 납니다. 삶이 무엇이 간데 한시도 쉬지 않고 그리 사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빠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는 것입니다.
오빠와 형제의 연을 맺고 살았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오빠의 노력과 사랑으로 오늘의 제가 있음을 기억합니다. 고단했던 오빠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잊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당신을 생각하고 추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