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내 방문 옆에는 외양간이 있었고, 항상 한우 암소와 송아지가 3~4마리가 여물 시간대에 맞추어 "음~~ 머"하며 울곤 하였다. 풀을 베어다 먹이기도 하고, 추수가 끝난 겨울에는 볏짚을 작두로 잘게 썰고, 콩깍지를 가마솥에 넣고 여물을 끓여 주곤 했다.
한우가 3~4마리가 항상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우시장에서 괜찮은 암소를 구매해서 새끼를 낳고, 어미소는 잘 비육해서 우시장에 판매하는 업을 가진 "소장수"이었기 때문이다.
송아지가 태어나는 광경을 어려서부터 보았다. 아버지는 어차피 갔다 팔 송아지이긴 했지만, 건강히 자라도록 겨울이면 입다만 옷가지를 기워 조끼식으로 덮어주고, 때에 맞추어 주사를 놓아주며 자식 키우듯 기르신 것 같다.
국민학교 시절, 3~4km 떨어진 춘천 우시장에 아버지가 소를 팔러 갈 때면, 코뚜레에 연결한 줄을 잡고 논두렁을 따라 우시장까지 따라가곤 했다. 이른 새벽에..., 안개 자욱한 개울 길을 따라 우시장에 가면, 쇠로 만든 구조물에 끌고 간 소를 묶는다. "소장수"들의 거래가 시작된다.
거래가 완료된 소들의 엉덩이에 락카로 뿌려 글 혹은 자신만의 표식을 한다. 표식이 되어 있는 소는 거래가 완료된 소 이므로 다른 소장수들이 흥정을 하지 않는다. 소장수들은 바쁘다. 자신이 사고 싶은 소를 짧은 시간 내에 먼저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인다. 새벽에 열린 우시장은 1시간 안에 모든 거래가 거의 끝난다.
왜 우시장은 새벽 4시~5시, 이른 시간에 열리는 것일까? 옛날의 소는 농사를 짓는데 꼭 필요한 "역용우"로 역할을 하였다. 보통은 농사를 짓는데 필요하기에 기른 소이다. 이른 시간에 시장을 열고, 거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일상 때문이었을 거라 추축해 본다.
거래가 합의되면 현장에서 현금을 건네고, 거래되는 현금은 "전대"라는 돈주머니에서 꺼내 준다. "전대"라는 것은 돈이나 물건을 넣어 허리에 매거나 어깨에 두르기 편하도록 만든 주머니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 같다.
어린 나는 기르던 소를 팔고 돌아올 때면, 소의 슬픈 눈망울을 보며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곤 했었다.
새벽같이 따라온 아들에게 무엇인가 사주고 싶은 것이었을까?
우시장이 열리면 주변에 신발, 산나물 등 조그마한 시골장도 함께 열렸던 것 가
말표라는 브랜드이었던가?, 기차표란 브랜드이었던가? 기억이 제대로 나지는 않지만, 발목 주변에 복슬복슬한 털이 달린 신발을 사 주시었다. 그 신발을 신고 국민학교 졸업식을 했던 기억이 있다.
소의 값을 잘 받으셨는가 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
"뭘 좀 먹고 갈까!!"라며 우시장 앞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가신다.
식당에서 고기와 소의 생간을 시키시며, "너는 아직 어리니 생간은 살짝 익혀 먹어라~"라며 구워주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정말 오래도록 "소장수"를 하셨다. 운전면허가 없으셨기에 발품을 팔며, 농가에서 구매한 소를 차를 불러 집으로 데려오거나, 우시장으로 끌고 가서 팔아 중간의 이문을 남기곤 하셨다.
그 당시 "소장수"는 전대라고 배를 둘러싼 돈주머니에 항상 꽤 많은 현금을 가지고 다녔기에, 소매치기들이 노리는 표적 중 하나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상심 깊은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어머니와 심각한 이야기를 하시기에 들어보니, "소매치기가 점퍼와 전대를 면도칼로 절단하여 현금 모두를 훔쳐갔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정말 속상해하시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어려서 기억을 돌이켜 보자면, 소의 코뚜레와 작두, 원앙, 외양간에 관한 기억이 많다.
내 나이의 시골에서 자랐다면 그런 추억 정도는 있지 않을까?
단편영화 같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은데, 아버지는 기억을 되뇌어야만, 생각나는 그런 존재인가 보다.
그분들도, 나처럼 어린 시절이 있었고, 청년, 그리고, 누군가의 아버지로 삶을 살으셨던 분들인데...,
지나서 생각해 보니, 그분들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어떤 삶들을 살다 가신 걸까? 살아계실 때 많이 물어볼걸 하는 후회가 든다.
나이가 들어야,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얼마 전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아버지의 인생"을 기억해 보자면, 외롭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다. 가족을 위해서 끊임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는 것을...,
따듯한 대화를 해본 기억도 많지 않은데..., 더 많은 이야기를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