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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ephantmatch Production Dec 09. 2017

샌프란시스코, 탄산수처럼 청량한

#아래 글은 9월 15일자 빅이슈에 기고한 여행기사입니다.

이번 여행은 가이드북을 봐도 영 와닿지 않았다. 영화 한편을 마저 보고서야 운항 정보를 봤다. 내 위치는 태평양 어디 쯤이었으나 아직도 샌프란시스코와는 아주 먼 반대편이었다. 난 기내식으로 불편해진 배와 좌석을 제끼고 뒤통수를 내 코 앞에 노출하여 자기 권리를 만끽하는 앞열 아주머니와 함께 1,009km/h 속도, 10,058m 상공을 날고 있었다. 이 느낌 그리고 가상 지구본 상의 수치가 아마도 샌프란에 대하여 내가 느낀 첫번째 실감이었을 것이다.

익숙한 곳(예를 들어 일본처럼 사회 시스템이 흡사한)이 아닌 이상 난 글로 현지를 연상하지 못한다. 특히 유명 장소에 대한 단편적인 소개는 저 우주 어느 행성과 다를 바 없이 감정을 잇지 못한다. 헨젤과 그래텔 식으로 구식이다. 난 가는 길의 기억, 동서남북의 위치, 외웠던 대중교통에 대한 체험, 시차의 이질감 그러니까 출발지부터 내가 뿌린 단서를 이어 가까스로 현지의 감각을 갖게 된다. 난 그 연결고리 없인 단 하나도 체감할 수 없다. 가이드북으로 읽어본 현지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니까. 어쨌든 5년 만에 출장으로 다시 찾은 샌프란은 내 망각의 세계로부터, 조각난 기억을 암벽 삼아 더디게 오른다.

"이곳은 알레스카 빙하가 녹아 내려와 물이 차요. 그래서 해수욕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샌프란시스코는 캘리포니아 주에 속한 도시다. 한국에서부터 동쪽으로 1만km, 미대륙 서부 해안에 위치한 이곳은 우리와 14시간이나 시차가 나는 머나먼 곳이다. SFO공항에 도착하면 11시간의 장시간 비행 후에도 인천과 동일 날짜 동일 시간대에 도착한다. 정신 혼미한 시차를 해석하고자 내가 한시에 출발해서 11시간 지났으니.. 여기가 몇시일까 하다보면 어느새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입국심사관 앞에 서게된다. 그들은 친절하게 물어도 될 일을 애써, 그것도 마치 심문하듯 따져대니 당황하지 말길 바란다. 그들은 미국이 아무나 올 수 없는 강대국임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너 여기 왜 왔어! 그러게요...라는 심정이 된다면 성공한 셈이다.

회사에서 배려해준 가이드 정희정씨는 밝고 시원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설명엔 가끔 옛날 옛날에 식 구전동화같은 익살이 섞여있는데 난 그게 너무 재밌어서 넋을 놓고 들었다. 그녀는 미역줄기를 잡아뽑는 해녀처럼 내 망각의 세계에서 샌프란의 기억을 뽑아냈는데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샌프란은 미국에서도 가장 살고 싶은 도시 중에 하나라고 한다. 탄산수처럼 청량한 이 도시는 하루에도 사계절을 경험할 만큼 쾌적한 날씨를 자랑한다. "이곳은 알래스카 빙하가 녹아 내려와 물이 차요. 그래서 해수욕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녀의 설명이다. 한국과 비슷한 온도(6월 당시 25도쯤)라 여겼던 난 비상시로 챙겼던 청자켓을 유용하게 입었다. 온도는 비슷할지라도 그늘에서는 춥고 아침엔 쌀쌀한 편이었다. 날씨에 관하여 단 하나 불편했던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머문 3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날씨가 좋았다는 것. 비가 그리울 정도로. 파라독스다.
샌프란은 IT(Information Technology) 산업의 메카 실리콘벨리의 하나로 일자리가 풍부할 뿐더러 앤틱한 풍경으로 미국인들에게 소구하는 바가 많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 곳 주택은 그러한 경치를 유지하기 위해 빅토리아 양식으로 규제된다. 빅토리아 양식의 특징은 파스텔 톤의 화려한 색과 튀어나온 창틀 그리고 목재 건축이란 점에 있는데 목재는 샌프란에 지진이 잦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샌프란에 높은 건물이 드물다. 그 유명한 트랜스 아메리카 피라미드 역시 방진 설계를 위해 삼각형 모양이 됐다.

여기서 실리콘벨리라 호칭되는 지역은 크게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5개 카운티의 39개 도시를 말한다. 이 지역은 IT 산업의 특성상 아시아인이 30%를 차지하고 학사 이상 고학력자가 48%(미국 평균 30%)에 달한다. 이 지역은 페이스북, 구글, 애플과 같은 글로벌 기업 본사가 밀집되어 있고 스타트업 업체만 15,000개 정도다. 출장 중 뉴욕에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같은 미국이지만 뉴욕 현지인들에게 있어서 샌프란이란 전기차를 타고 IT에 민감하며 아시아인이 떠오르는 지역이라 한다. 클럽에서 만난 투자 회사 출신 뉴요커는 IT 일로 극동 아시아에서 건너온 내가 신기한 듯 보였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에는 전기차를 쉽게 볼 수 있는데 나 역시 회사 동료의 B class 벤츠를 타고 그 펀치력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 곳은 테크놀로지에 혐오를 느낀 히피들의 반문화 운동지였고 무지개 깃발을 상징으로 인간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곳이다. 실리콘밸리와 반문화운동이란 역설이 있고 진보적인 개성과 새로운 트렌드가 뒤섞인 곳. 여기는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originality가 있다.

트윈픽스(Twin peaks)
여정의 첫 시작으로 좋은 곳이다. 다운타운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곳은 샌프란의 전경을 담으려는 관광객들이 카메라 셔터를 연신 터트리는 곳이다. 나 여기 다녀왔어 라고 설명하기 좋은 요약된 경치다. 그들은 웅장한 마천루와 태평양을 보며 감탄한다. 하지만 이곳이 mission blue butterfly의 서식지였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바닥에 붙여진 작은 현판만이 이곳에 무지개 빛 나비가 몰려 살던 곳임을 기념하고 있다. 웅장한 경치와 함께 작은 나비가 살았음을 기념하는 이곳은 샌프란의 정중앙에 위치한 언덕이다. 이곳의 잔디는 노랗게 말라있는데 겨울을 제외하고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에 비가 내리는 샌프란시스코는 특이하게도 겨울이 되면 수풀이 푸르러진다. 이곳에서부터 캐스트로, 피어39, 금문교가 순서대로 이어진다.

캐스트로(Castro)
영화 밀크(숀펜 주연 2010년 작)를 보기 전까지 난 하비 밀크란 존재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하비 밀크는 성소수자들이 캐스트로에 하나둘씩 모여들던 70년대 당시, 그들의 인권을 위해 싸웠던 시의원이다. 남성 동성애자였던 그는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3번 낙선했고 끝내 최초의 동성애자 시의원이 되었으나 동료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샌프란시스코는 대안적 삶과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곳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캐스트로 길 곳곳에 걸려있는 무지개 깃발은 그러한 정신을 상징한다. 가장 힙한 레스토랑과 샵이 밀집한 이곳은 청개구리를 두 팔 벌려 맞이하는 요람이다. 전체주의적인 풍토와 자신이 소외된 일상에 지친 사람이라면 이 곳의 자유로운 공기에 치유될 것이다.


피어39(Pier 39)
관광지를 좋아하지 않는 난 이런 조언을 하곤 한다. 먼저 여행지에 도착하면 인포메이션을 찾아서 관광 지도를 받아. 그리고 그곳만 피해서 다녀! 피어39는 북적이는 관광지다. 하지만 관광지라고 관광객처럼 다닐 필요는 없다. 요트가 있고 맛있는 해산물과 와인이 있는 곳에서 천천히 풍경을 즐기면 그만이다. 사진 찍는 것은 잠시 멈추고 호주머니에 두 손을 넣어 천천히 걷는다. 마치 산책 나온 듯 휘파람도 불어본다. 부두 끝에 가면 물개도 있고 역사 깊은 회전목마도 있다. 태평양 바다를 마주한 곳에 샌프란의 상징, 하트 조각상도 있다. 그곳에 팔던 기념품만은 중국산이었지만.

금문교(Golden gate bridge) & 소살리토(Sausalito)
금문교는 이름 때문에 금색일 것 같지만 실제로 붉은 색에 가까운 international orange다. 이름이 그러한 이유는 다리가 샌프란시스코 만, 금문에 건설됐기 때문이다. 이 곳은 골드러시 시절 금이 수출되던 곳이다. 엔지니어 조셉 스트라우스의 집념으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당시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설계를 무려 10년의 설득 끝에 만들어낸 혁신이다. 두 개의 타워에 상판이 대롱대롱 메달린 금문교는 27,000여 개의 철심으로 만들어진 로프를 양끝으로 당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처럼 지지대를 높였다고 한다. (지뢰대의 원리라는데 난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 각자의 세부 파편으로 이루어진 교각은 지진이 발생할 때 지그재그로 교차하여 흔들릴 수 있도록 설계 됐다. 한 명의 천재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든 이 거대 건축물은 오늘도 수만명의 평범한 일상을 이어준다.

다리를 지나면 좌우 갈림길 양편으로 소살리토와 마린 지역이 있다. 헐리웃 스타의 별장이 많다는 소살리토는 해변가 언덕에 위치한 아름다운 부촌이다. 상대적으로 평범한 마린 지역은 고 로빈 윌리암스가 살았던 곳이다. 그는 끝내 소살리토로 거처를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로빈 윌리암스를 사랑했던 샌프란 시민들은 마린으로 통하는 터널에 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뭔가 그 사람다운 유례가 있고 천재의 고집이 느껴지는 곳. 거대한 다리가 흔해 빠진 요즘 금문교가 흔해 빠지지 않은 이유다.

인 근 - 몬터레이(Monterey)/페블비치(Pebble beach)/카멀(Carmel)
몬트레이부터 페블비치를 따라 카멀로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는 익숙하다. 마치 동해안 도로의 풍경처럼 짙고 깊다. 같은 태평양은 그렇게 닮은 구석이 있나보다. 이 원류의 동질감을 이곳 사람들은 달리 해석했다. 경외감을 가지고 그대로 두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페블비치 골프코스는 유명세에 비해 조용하다. 아마도 그래서 유명할 것이다. 정복하지 않은 듯한 그 풍경이 내겐 아름답다.  

이 지면에 다 다루지 못했던 많은 곳. 그 긴 여정의 끝에 카멀 시티가 있었다. 이 곳엔 바다가 있다. 알레스카 빙하가 녹아 내려온다는 이 곳의 바다는 어떤 느낌일까 여행 내내 궁금했다. 좋은 레스토랑과 주택이 많은 카멀 지역에서 맥주 한잔과 블루치즈버거를 먹고 천천히 비탈길을 내려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순백의 모래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게 마지막인가. 3주의 기억. 숨가빴던 일정. 어쨌든 이 곳 사람들도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어쨌든. 머나먼 길 끝에서의 마지막 감상이다.


여행은 조바심이 들곤 한다. 일로 쫓겨 온 이곳이 그러했다. 하지만 며칠을 묶든 여행은 총체적으로 느껴지는 그곳만의 감각이 있다. 여행지는 철저히 준비했든 하지 않았든 냉탕에 몸을 담그는 것처럼 즉각적이고 즉흥적인 체험이 있기 마련이다. 출발편 비행기에서 가까스로 읽었던 가이드북 하나로 샌프란은 내게 낯설고 먼 곳이었지만 지금 난 그곳을 그리워 한다. 카톡 소리를 듣고 웃던 택시 기사 아저씨, 어느날 예고 없이 마주쳤던 빨간 노을, 시큰둥한 출근길의 풍경. 아마도 여행의 순간은 절대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가슴에 새겨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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