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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ephantmatch Production Dec 09. 2017

참을 수 없는 동물의 사소함

오보이 2015년 9월 기고글

3년 전에 한동안 채식을 했다. 회식 자리에서도 고기를 먹지 않았으니 많은 이의 젓가락질을 민망하게 했을 것이다. 한 후배 여사원이 왜 안 먹는지 묻길래 염치불구하고 공장식 축사와 도살에 대해서 얘기해줬는데 으.. 진짜요? 하면서 족발에 된장을 발라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SNS에 반려견 사진을 올리던 여사원이 자기는 보신탕도 먹는단 얘기를 덧붙이길래 조용히 술이나 마셨던 기억도 난다.    


내게 개인의 식성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다만 그때 맛보았던 다수의 냉소는 허망하고 씁쓸했다. 동물 대 인간 혹은 동물 대 동물 혹은 객체와 객체, 그 무엇으로 호칭하든지 간에, 둘 간에 지켜야 할 선(線)과 균형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생소할 뿐이다. 누구 하나의 신념은 보편적인 질서로 확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혼자 고고하게 버스를 기다리다 몰려드는 사람들과 엉망진창이 되는 줄과 같이 대중과 합의되지 못한 고고함은 냉소의 대상이다. 그러니 혼자 고상하다는 것, 그거 부자들 코스프레 아닌가? 싶은 눈치가 보이면 어쩔 수 없다. 이럴 수밖에. “뭐 그래 미안하다 인마”


난 동물을 사랑하지만 동물이 인간 삶의 도구로 쓰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동물이 얼마나 사소한 용도에까지 쓰이는지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난 대관령 목장에 갔다가 이 건강한 젖소들이 라면 스프가 된다는 안내를 듣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아름다운 강원도 풍경과 여유로운 소때의 경치에 젖어있던 순간 그곳은 참혹한 살육 시설로 탈바꿈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내 허리에도 가죽 벨트가 있고 한낮 점심 한 끼 된장찌개에도 고깃덩이가 들어간다. 이때 고기는 음식명의 타이틀도 얻지 못한다. 내 겨울 외투에도 털이 달려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 털의 출처 아니 진짜 동물의 털인지 조차 관심이 없다. 사실은 산 채로 처참하게 벗겨진 라쿤의 가죽이지만.


동물과 우리의 최초 관계는 필요성의 경계선에서 만난다. 다만 그 필요함이 사소할수록 난 동물의 비참함에 속이 불편하다. 균형이 깨진 것이다. 삼겹살을 통 크게 시켜두고 배 터져서 못 먹겠다며 방치한 고기를 볼 때, 곰 뱃속에 빨대처럼 꽂아놓은 호스를 볼 때 난 한숨짓게 된다. 동물보호가 그 필요성을 무시할 때도 균형이 깨진 것이다. 채식? 내가 고기를 거부하고 그들을 빤히 보고 있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쨌든 외줄 타 듯 중심 잡힌 보편적 공감대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닌지 싶다. 그러니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이 보신탕을 먹는다 해도 내가 뭐라 하랴.

나는 ‘개 아빠'다. 자식 없이 포메라니안을 딸처럼 키운다. 모란시장에서 죽어가는 개들 소식을 접하면 혹시나 내 딸을 잃어버릴까 목줄을 꽉 잡게 된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난 그녀가 단박에 차에 치여 죽길 바란다. 그만큼 동물이 잔인하게 이용되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 미루었을 때 현실과 동떨어진 실천은 오히려 반감을 사는 것 같다. 지금은 채식주의자가 한 명 더 늘어나는 것보다 동물보호의 대중적 체계를 잡아줄 사상가가 더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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