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속의 재생

이별을 겪은 모든 이들에게

by 아토

상실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붙잡으며 추억을 되새김하는 방식으로 상실을 견디려고 애쓴다.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던 공기와 따사로운 햇살, 상대의 수줍은 미소와 그것을 가슴 가득 담아내던 나의 환한 마음까지. 환영 같은 그 재생의 순간을 누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오히려 홀로 덩그러니 남아있는 차가운 공기의 무게에 짓눌려 상실을 더 절절하게 체감하게 된다.




고등학교 문학 수업시간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생명과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이과 학생이었지만, 성적이 안 나오는 수학은 내팽겨치고 쌩뚱맞게 문학 파트를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전 과목 다 골고루 고득점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그 바쁜 수험 생활 중에 굳이 언어영역 학원까지 다녔다. 특히 문단의 배치와 논리 전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비문학 파트보다, 함축적인 시어에서 작가의 정서를 파악하고 서사를 읽어내는 문학 파트를 훨씬 좋아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수능 준비와는 거리가 멀었고, 문학소녀의 사심 채우기용 취미였던 것 같다.


언어학원의 문학 선생님은 국문학과 출신의 장발을 휘날리던 멋스러운 삼십 대 후반의 남자 선생님이었다. 시 한 줄을 읽고 마치 혼자 소주 한잔 걸친 듯 "크-"하고 감탄사를 내뱉곤 하였다. 그리고 순진무구한 고등학생들에게 “너네, 이 문장이 정말로 뭘 의미하는지 아냐? 슬픔과 그리움은 찬란한 햇살 속에서 더 진하게 피어오르는 이 감정이 뭔지 알기나 하냐?” 라며 본인의 일화를 하나씩 풀어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수험생 꼬맹이들을 데리고 무슨 잘난 체를 그리 하셨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의 나는 한 줄의 문장에서 한 편의 서사를 풀어내는 문학 선생님의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깊은 세계를 가슴에 품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허난설헌의 시였는지, 황진이의 시였는지, 혹은 작자 미상의 시였는지 글을 쓰는 지금에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별한 이를 무척 그리워하며 한밤중에 홀로 나와 보름달을 보고 있는 시의 한 장면이었던 것 같고, 이 화자가 할 말로 적절한 선지를 고르는 문제였다.


“아, 이별한 님이 너무 그리워. 그러니 꿈에서라도 님을 만나기 위해서 잠을 청해야겠다!”라는 화자의 말이 있었고, 나는 당연히 이를 적절하다고 골랐다. 결국 문제를 틀렸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던 나는 문학 선생님에게 가져가서 아무래도 답지가 틀린 것 같다며 따졌다.


“아니, 보고 싶은 사람. 꿈에서라도 보면 얼마나 좋아요. 저는 꿈에서 조지 클루니 보면 그날은 기분이 너무 좋던데요?”


“야 이놈아. 이별 안 해본 티를 내기는. 꿈에서 보고 나면 깨어난 후 더 허망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법이야. 게다가 너무 그리워서 달빛이라도 보러 나온 사람이 어떻게 다시 편히 잠들겠냐. 하여간, 가끔은 내가 이런 꼬맹이들한테 문학을 가르치는 게 맞나 싶다."




내가 고른 선지의 답이 오답이었음은, 그 뒤 가슴 아픈 헤어짐의 시간들을 겪어내며 천천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시를 읽어낼 수 있는 어른이 되어왔다. 나도 어느덧 그때 그 문학 선생님의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끝끝내 내게 가르쳐주지 못했던 또 하나의 진실을 나는 스스로 배우게 되었다.


그리움의 강을 건너, 그와 나 사이에 흐르던 사랑의 숨결을 재생하는 방법을. 그가 나를 바라보던 따스한 시선으로 내가 내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또 꼭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남는다.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하던 함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남김없이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아나가려는 그 자세가 진실했던 사랑의 재현이자 증명이다. 사랑은 둘 사이의 한 점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사랑이 세상을 향해 흘러나가게 열어둠으로써 온 세상을 품는 둥근 원으로 완성된다.


우리는 매 순간 만물과 새롭게 만나며, 동시에 헤어지고 있다. 생의 진실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사랑과 다시 조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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