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고에서의 아침
3년 전 큰 규모의 국책 과제에 참여하게 된 이후로, 연구 내용을 발표하기 위해 매년 해외 학회에 가고 있다. 스웨덴, 스페인, 호주에 이어 이번에는 미국에 왔다. 현재 샌디에고의 작은 호텔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국제학회 참석 차 해외를 간다기보다는 해외로 나가기 위해 국제학회에 참석하고 있다는 게 내게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예전에 한 번 사주를 본 적이 있었는데, 내 사주에는 수(水)가 전혀 없기 때문에 물 건너 해외여행을 다니면 수 기운이 보충되어 좋을 거라는 조언을 들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골골대는 체력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나오면 신기하게도 점차 컨디션이 좋아진다.
메마른 풀처럼 시들시들했던 내가 물을 만난 듯 다시 살아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육아에 협조적인 친정과 남편 덕분에 애엄마 신분임에도 일 년에 한 번씩 일주일가량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올해는 호주 학회도 다녀왔으니 두 번째 자유부인 타임이다! 의사가 된 뒤로 꽤 오랜 시간 동안 분 단위로 쪼개는 삶을 살아왔었는데, 혼자 해외에 나와 있다 보면 온전히 나만의 24시간을 사용하면서 그 조급증이 나아지곤 했다.
그리고 서구 사회가 가진 특유의 자유로움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해외에서 이민자로 살게 되면 또 다른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해외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보면 한국 사회에서 받는 사회적 압력이 슬슬 흐려지는 걸 몸으로 느끼는 때가 꽤 있다. 스웨덴에서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고속열차를 탄 적이 있었는데, 내 옆자리에는 스웨덴 청년이 앉아 있었다. 핑크빛 빡빡머리에 얼굴 양쪽으로는 머리를 예쁘게 땋고 온몸은 타투로 도배한 청년의 얼굴을 보며, 속눈썹이며 얼굴선이 남자답지 않게 참 곱다고 느꼈는데 웬걸.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목소리가 굉장히 여성적이었다. 이듬해 스페인의 몬세라트 기차역에서는 맨몸에 비키니와 망사 스타킹을 입은 채 아주 즐겁게 활보하는 유럽 아저씨를 본 적이 있다. 스웨덴에서나 스페인에서나 나 혼자 눈이 휘둥그레 해졌을 뿐, 주변의 현지인들은 특이한 옷차림의 그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가 내게 묘하게도 정신적인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역시나 샌디에고에 와서도 첫날 아침부터 즐거운 일을 겪었다. 새벽부터 너무 배가 고파서 아침 7시가 되자마자 쌩하니 호텔 주변의 조식 식당으로 달려갔다. 아주 쾌활하고 굵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고 있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보며, '역시 캘리포니아에서는 남자들도 햇살같이 발랄하네'라고 생각하던 순간 종업원이 몸을 돌려 내게로 다가왔다. 그의 봉긋한 가슴 라인을 보며, 목소리가 낮고 굵다고 남자로 오해했던 나의 꽉 막히고 좁은 편견을 반성했다. 그의 친절한 서빙을 받아 맛있게 아침을 먹던 중, 뒤늦게 출근한 종업원이 그에게 다가가 "Hello, brother."라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 음??!?!!
어쨌든, He or She가 서빙해 준 27불짜리 에그 베네딕트는 참 맛있었다. (맛 없었으면 눈물났을 가격이기도 하다.) 당신이 참 친절하고 스윗해서 샌디에고 여행의 시작이 아름다워졌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모든 테이블에 친절하게 응대하는 그를 불러 세울 틈이 나지 않아서 좀 더 두둑한 팁으로 감사함을 대신했다. 중요한 건 그의 성별이 아니었고, 다정하고 친절했던 웃음과 몸짓이었다.
살다 보면 내가 알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그저 반쪽짜리 진실이었음을 깨닫는 아찔한 순간들이 있다. 그 '깨짐의 충격'은 내 전부였던 세상이 사실은 경험과 감정, 그리고 편견이 뒤섞인 필터로 재구성된 주관적 세계였음을 일깨운다. 날것 그대로의 너와 나를 마주하는 일이 두렵더라도, 진짜 아름다움은 어쩌면 그렇게 깨어진 틈새를 타고 흘러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니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열린 가슴으로 세계를 모험해 볼 일이다.
https://brunch.co.kr/@kimgeon/318
태평양 위를 날고 있을 때, 현루님께서 제게 큰 선물을 주셨네요. 미국에 도착해서 핸드폰을 켠 순간, 구독과 라이킷 알림이 잔뜩 떠서 깜짝 놀랐습니다. 영세한 1평짜리 구멍가게가 갑자기 웨이팅도 있는 브런치 맛집이 된 듯! 너무 벅차고 황송합니다.
얼마 전 있었던 제 생일에는 축전 시도 보내주셔서 주눅 들어 있던 제게 씩씩하게 살아갈 용기를 주셨는데, 그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또 큰 선물을 한 아름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그때 현루님께서 보내주신 축전 시와 함께 글을 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