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고에서 혼자 보내는 하루
국제 학회가 끝나자 함께 시간을 보내던 다른 병원 교수님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바로 귀국행 비행기를 타면 병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 더 쉬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혼자 미국 땅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샌디에고에서 포닥을 하는 친한 대학 선배가 있지만, 이미 주말에 그 귀한 인재가 훌륭한 여행 가이드를 해준 터. 평일에도 놀아달라고 하기엔 염치가 없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꼭 가고 싶었던 관광지들은 다 둘러보았기도 하고, 원래 관광지보다는 로컬 문화를 즐기는 것을 훨씬 좋아하기에 고민을 하다가 샌디에고 중앙도서관에 왔다. 낯선 도시의 도서관은 그 도시의 온도를 잘 보여주는 공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벌레다운 선택이었다. 그래도 미국은 확실히 미국이더라. 안전한 관광지 한복판에 호텔을 잡았기에 그동안은 몰랐는데, 샌디에고 중앙도서관까지 걸어서 가는 길이 은근히 험했다. 좁은 길로 들어서자마자 어딘지 모를 음침함과 섬뜩함이 느껴져서, 큰길로 돌고 돌아서 왔다.
그런데 웬걸, 아홉 층 높이의 현대적인 유리 건물로 들어서니 아까 슬슬 피해 다녔던 홈리스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도서관 입구 앞에는 수레에 잔뜩 살림을 싣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고, 3층 열람실 한쪽 구석에서는 누군가가 책상에 엎드려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곳곳에 보안요원들도 빼곡히 배치되어 있어 한국 도서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security라 적힌 검은 유니폼을 입은 그들이 무전기와 총을 차고 천천히 서가 사이를 순찰했다. 수많은 홈리스들이 낮 동안 시원하고 쾌적한 도서관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입구를 들어서며 '장서와 시설 보호를 위해 보안요원들을 배치했나?' 하고 잠시 생각했던 순진한 책벌레는 뻘쭘해졌다.
한국 도서관에서는 늘 조용한 창가 구석자리로 숨어들곤 했는데, 여기서는 고개만 들면 보안요원이 보이는 도서관 한복판, 밝은 조명 아래 자리를 잡았다. 긴장해서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다 건장한 체구의 보안요원과 눈이 마주쳤다.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그가 "Hi~" 하며 살짝 웃어준다. 그 순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주 어린 시절 미국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 미국이라는 공간이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미국인들의 밝은 인사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길을 걷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Hi, have a nice day!"라며 모르는 이에게도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문화. 방금 그 보안요원의 인사가 그때 그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그 영향이었을까.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도 한몫했겠지만, 어린 시절 미국에서의 경험이 내 삶의 태도를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잘 웃고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연다. 물론 이런 성향이 늘 장점만은 아니었다. 엄격한 분위기의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받으면서는 이 웃음기 많은 표정 때문에 핀잔을 많이 들었다. "아토 선생은 늘 웃고 다니네. 인생이 즐겁나 봐?"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이 무거운 공간에서도 가벼운 미소를 잃지 않는 것이 나의 작은 생존법이라고. 즐거워서 웃는 것인지, 웃어서 즐거운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웃고 살다 보면 어느새 즐거워지는 것이 아닐까?
창밖으로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높은 천장의 통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서가 사이사이를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가끔씩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이 공간의 고요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내일이면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돌아가야 한다. 이 따뜻한 샌디에고를 떠나 춥디추운 한국으로. 지금 내가 누리는 밝고 따사로운 햇살, 온몸 세포까지 데워주는 열기, 눈만 마주치면 웃어주는 사람들의 미소, 그리고 타지의 도서관에서 느긋하게 에세이를 쓰는 이 여유로움까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누리지 못할 것들이기에, 나는 이곳에 온전히 존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삶도 걱정하지 않는다. 따뜻한 남쪽 도시에서 돌아올 내가 얼지 않도록 두꺼운 패딩을 챙겨 공항까지 달려와 줄 가족이 있고, 여행 기념품을 핑계로 만나 샌디에고 이야기를 잔뜩 풀어놓을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나는 춥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