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 중력
영화 Interstellar (경도의 스포일러 내재).
2014년 가을 개봉. 러닝타임 3시간의 이 영화. SF 영화를 좋아하는 터라 비주얼 자체만으로 만족했으나 스토리 약간 진부하고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끼워 넣은 느낌. 배우들의 연기도 그다지. 게다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상충한다는 생각. 나의 이해력이 부족일 수도. 하지만 역시나 <비주얼은 볼 만했다>. 발 디디고 있는 이 푸른 별 저 너머가 그리울 때 가끔 한 번 씩은 봐줘야 할 그리고 생각해줘야 할 우주. 은하계. 코스모스.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도 중력을 향해 여유로운 태도를 취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준다. 지상에서의 모든 것들쯤 가벼이 즐길 수 있는 초월적 가벼움의 자유를 준다.
영화 내내 읊어주는 Dylan Thomas 의 시.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어두운 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말라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노년은 날이 저물어감에 불 타 올라야 하고 몸부림쳐야 한다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 (중략)
영화의 ‘감동’ 주제 중 하나는 ‘부성애’이다. 부성애 또는 모성애는 극한 상황에서 나의 생존본능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고 종족보존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내 자식을 위한 부/모성애의 발휘는 동물적 본능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고 그에 관련된 내용에서 내가 받은 감동은 내 자녀에게만 유효할지 모른다. 즉 역설적으로, 대의적 명분으로의 승화, 적용, 실천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내 자식 챙기려면 영웅이 되는 것은 포기해야..). 이 부성애, 모성애를 전인류에 대한 ‘인류애’로 전환시키려면 그냥 설득으로는 부족하고 희대의 ‘사기극’이 필요할 지경. 그렇다면 소위 인류를 위해 자신의 가정을 희생하는 범인 아닌 영웅적 사람들의 가족은 누가 돌볼 것 인가?
영웅이 될 것인가. 가족을 지킬 것인가.
이 명제에 대해 영화는 갈팡질팡하고 있다.
영화 초반부터 나오는 ‘유령’에 관한 해석도 마찬가지: 부모는 자식을 위한 유령과 같은 존재. 추억의 조각으로 남는다고 말한다.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부모 된 입장으로 유령으로서의 스스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려면 ‘스러져감’에 수긍해야 한다... 저항과 순종의 갈림길 선상.
영화에는 또한 유령과 함께 ‘그들’ 이 등장한다. 처음부터 나는 ‘그들’을 ‘아버지 내지는 어머니’로 해석했다. 물론 내가 생각한 부모는 좀 더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이기도 한 의미의 그 아버지이자 어머니. 결국 영화는 인류 역사 통틀어서 가장 숭고하고 강력한 그래서 모든 문학작품 및 영화에서 써먹을 대로 써먹지만 그래도 꽤 잘 먹히는, 그러나 아주 잘 포장하고 연출하지 않으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over-wrought) 주제 바로 그것을 결론으로 들이민다. 포장과 연출이 서툴다는 것이 문제. 영화 Gravity에서 이미 비스무리하게 써먹었다..
다시 위로 올라가서, 위의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어두움은 무엇일까? Aging. 나이 듦? 순리에 역행하는 몸부림에의 종용? 맞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에의 도전, 저항. 필요하다. 영화 속에서 순리에 저항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자식을 위해, 다른 이들의 자식들, 후손들을 위해 현실에 굴하지 않고 우주 밖으로 나가는 것? 생명이 꺼져가는 별 지구에서 가족을 부둥켜안고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영화는 무엇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가? 쿠퍼는 머피를 남겨 두고 우주로 향한다. 머피는 오빠를 따돌리고 조카들을 구하고자 한다. 쿠퍼가 소멸해가는 지구에서 남은 시간이나마 가족과 시간을 보냈어야 옳을까? 쿠퍼의 딸인 머피는 아빠가 떠난 지구에서 남은 유일한 가족, 조카들을 오빠로부터 빼내어 (폐질환 치료를 위해) 치료받게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일까?
따지자는 것이 아니고 생각해 볼 명제라는 것이다. 내 이해력의 파라미터 내에서는 제대로 딱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게다가 Murphy's Law, Lazarus, Endurance, Mann 박사 (배신은 언제나 인간의 몫 -- man's stake 이라는.) 등 1단계 수준에 그친 메타포들도 약간 실망이긴 했으나, 생각할 점들과 시각적 지평을 제공해준다는 것만으로도 IMAX 티켓이 아깝지는 않았다.
2014년 초반부를 장식한 사건 Cosmos: Space Odyssey 와의 재회. 여기서 얻은 만고불변의 결론, <중력>. Interstellar를 통해 이 “중력” 이란 것이 어쩌면 ‘사랑’ --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우려먹고 우려먹은 over-wrought.. 의 과학적 원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제법 귀중한 깨달음이므로 그것으로 족했다. 게다가 영화의 '비주얼' (거듭 강조)!.
-- 2014 가을 - 삼라만상의 근원인 중력'교'에 다시 입문하며.
딜런 토머스(Dylan Thomas, 1914-1953 웨일스의 시인)의 시 전문.
-- 1951년, 임종을 앞둔 부친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노년은 날이 저물어감에 불 타 올라야 하고 몸부림쳐야 한다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
Though wise men at their end know dark is right,
지혜로운 자들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어둠이 지당함을 알지만
Because their words had forked no lightning they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번개처럼 번쩍이지 않기에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
Good men, the last wave by, crying how bright
선한 자들은 마지막 파도가 지난 후
Their frail deeds might have danced in a green bay,
그 덧없는 행적들이 푸른 바닷가에서 얼마나 빛나게 춤추었을지 한탄하며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
Wild men who caught and sang the sun in flight,
달아나는 해를 붙잡고 노래한 사나운 자들은
And learn, too late, they grieved it on its way,
섭섭히 해를 보내준 걸 뒤늦게 알고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
Grave men, near death, who see with blinding sight
죽음이 가까운 심각한 이들은 / 눈멀게 하는 시각으로,
Blind eyes could blaze like meteors and be gay,
멀은 눈도 유성처럼 불타고 명랑할 수 있음을 깨닫고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
And you, my father, there on the sad height,
그리고 당신, 저 슬픔의 높이에 있는 내 아버지
Curse, bless, me now with your fierce tears, I pray.
이제 당신의 성난 눈물로 나를 저주하고 축복하길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말라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