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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지 May 28. 2017

[Short] 의자

당신은 의자를 찾아가 위안을 소비한다. 그리고... 

몹시도 부지런한 부부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쉴 틈 없이 몸을 움직였다. 고단한 등을 펴기 위해 잠시 앉아 있을 때도 있었지만 부부는 대부분 시간을 직립하여 살아갔다. 가게 안에는 가지각색의 의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놓여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의자, 견고하게 생긴 검은 상판을 가진 스툴, 두툼한 보라색 천으로 배색된 암체어, 팔걸이 날개가 달린 윙체어, 일인용 소파. 사람들의 지친 등뼈를 받아내던 저마다의 사연은 달랐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모두 이곳에 함께였다. 의자들은 말이 없었다. 각자의 한가로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가게 뒷 편 주차장 쪽으로 난 문을 통해 사내가 무거운 것을 끌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여보.” 

여자와 사내가 힘을 합하여 육중한 물건을 끌고 잡아 당기고 한다. 


“놔 둬요, 내가 할게. 커피나 주구랴.” 

스르락, 바닥을 닿는 잰 걸음소리. 경쾌한 달그락 소리와 함께 쪼르륵 똑똑. 작은 찻잔 안에 이는 파동. 설탕이 녹으며 사라지는 소리. 커피라는 것은 그것을 마시는 사람의 몸에 어떻게 스며드는 것일까, 의자는 생각했다. 밀폐된 가게 안에서 커피라는 불리우는 것의 향이 몸 속으로 서서히 파고 든다. 낡은 가죽의 익숙함처럼 느슨하면서도 촘촘히. 의자는 커피의 향을 들어 마신다.


“자, 여기요. 이거 마시고 해요.” 어색하지 않은 정적이 흐른다. 익숙한 눈빛이 교환되는 순간이겠지. 눈이라고 짐작되는 부위를 가늠해보며 의자는 찡그리는 시늉으로 부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창 밖에는 휘이잉 바람이 불고 유리창은 바르르 떨고 있다. 바깥과 안의 공기가 내는 온도의 차이, 그 경계선상에서 유리가 진동하고 있다. 커피의 향은 가게 안 물건들에게 공평히 당도하여 원을 그리며, 춤을 추듯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안락함 속에 이는 떨림. 긴장감을 일으키는 기분 좋은 대비. 그 외엔, 그것을 최대한으로 느끼는 것 외엔 딱히 무엇도 할 수 없는 투명한 어느 겨울의 오후.


나른한 기운에 눈을 감고 두꺼운 망막 위로 떠올려보는 것은 한 아이의 모습이다. 마른 몸에 긴 팔과 긴 다리를 가진, 흰 얼굴을 한 아이. 의자는 ‘생각하는 의자’ 였다. 거실 한 구석에 놓여있던 의자에게 유일한 손님이었던 아이.


의자는 ‘생각하는 의자’ 였다


“형석아, 생각의 의자 5분.” 


바닥을 꾹꾹 누르며 타박타박 다가 온 아이는 체념한 듯 지긋이 누르며 제 무게를 의자에 쏟았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다리를 간지럽혔지만 그 가느다란 감촉은 3월의 햇살처럼 반가웠다. 아이의 체온이 뜨겁고 불안해질 무렵 ‘팅’ 하는 타이머 소리가 들려왔고 아이는 날아갈 듯 떠나갔다. 엄마는 아이의 발걸음을 찾아 다가갔고 그들은 서로를 포옹했다. 그것은 의자의 짐작일 뿐이지만 확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데 보일러가 좀 팔리려나.”


손바닥과 손등이 배시시 비벼지고 서로를 향한 길 위에 시선이 놓인다. 번져오는 부부의 잔잔한 온기. 영원히 알 수가 없는 것이기에 의자에게는 더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토록 충만한 느낌이 또 있을까. 상상이 더해져서일까. 아이와 닿았던 면적의 감촉. 상상이 아니었던 그 장면과 느낌을 의자는 자꾸 자꾸 떠올린다. 떨쳐버릴 수가 없다. 


“생각의 의자. 10분”


다다다. 아이가 뛰어온다. 이번엔 거친 숨소리, 격앙된 몸의 진동. 다가오는 아이의 엄습한 분노에 의자는 뼛속까지 위축되고 목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격노한 아이가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온다. 이제까지와는 대단히 다른 어떤 날 선 기운. 아이는 제 몸을 주지 않은 채 날카로운 것으로 무수한 직선을 긋기 시작한다. 그저 놓여 있을 뿐인 의자를 향해.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몸 속 깊숙이까지 들어와 뼈에 닿고 부우욱, 소리와 함께 내 속의 것들이 삐져 나간다. 보드라운 것들이, 의자가 진주처럼 품고 있던 것들이 뭉그러진 형태로. 서너 줄의 선에 의해 내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의자는 주체할 수 없는 비통함으로 차라리 어디론가로 이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때 몹시 수치스러웠고 슬펐단다. 아이야.


키가 큰 엄마가 다가왔다. 고개를 떨군 작은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진동하는 바닥의 나뭇결을 타고 미세한 습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났을까. 


무거운 정적이었다. 아무 단서도 얻어낼 수 없는 침묵. 엄마는 의자를 말없이 벗겨내기 시작했다. 의자가 입고 있던 모든 것이 들어내어졌다. 그렇게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의자는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눈이 부셨다. 바라보고 있는 엄마와 아이가 보였다. 나는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것일까, 감고 있는 것일까, 의자는 생각했다. 알고 싶었다.


“옹이...” 


아이와 엄마의 눈동자 속에 앉아 있는 발가벗은 자신의 모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격한 풍경이었다.


“이 암체어, 쿠션 부분이 좀 엉성해 보이지 않아요?”
“프레임은 좋은 나무인데. 떡갈나무인가?”

“글쎄요. 천은 비싼 재질 같은데 힘이 없어 봬서... 타커로 좀 더 박아볼까요?”

“전체적으로 다시 손을 봐야겠어. 당신이 좀 살펴보겠수? 나는 사거리 사무실 폐업하는 데 좀 다녀와야겠어요.”


의자는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보이지 않고도, 보지 않고도 좋았다. 따스함의 느낌일까. 옹이라 불리던 의자의 눈. 눈이 가리워진 채, 의자는 회복 중이다. 아이와 엄마의 눈동자 속에 우두커니 박혀 있던 자신의 모습. 그 모습을 기억하며 의자는 잠시 이 곳을 지나가는 중인 것이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 땅의 경계에서 은은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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