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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지 Jul 19. 2017

[단편소설] 장미의 집

콘크리트로 세워진 신기루 같은 곳. 그 곳에 다시 돌아온 사람.




이른 꽃망울을 피우려는 듯 차가운 나뭇가지들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몇 일간 기세등등했던 동장군이 잠시 주춤하자 망설이던 아지랑이가 용기를 낸 듯 했다. 공기 중에 달뜬 봄의 열기가 한 방울 잉크처럼 퍼졌다. 살갗은 차갑지만 볕은 따스했다. 아파트 건물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정원에 둘러진 낮은 펜스에 참새들이 조르르 앉았다. 작은 새들은 이 방향, 저 방향 가리지 않고 천진난만한 이야기와 숨소리를 내보내는 중이었다. 화단에는 지난 가을 떨어진 꽃잎과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꽃잎은 변색되었고 낙엽은 소리로 변했다. 저들은 썩지도 않은 채 겨울을 날 참인가, 바스락 소리를 내는 낙엽들이 참 태평도 하다고 세민은 생각했다. 그래도 저렇게 수북히 쌓여 있으니 서로 온기를 주고 받으며 포근하기는 하겠지.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온기일까 양분일까.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사실인데. 굳이 하나만을 고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명제가 아닌가. 보도와 화단은 구획이 명확했다. 낙엽들은 펜스 안에 철저히 격리되어 있었다. 보호된 낙엽들. 어쩌면 그래서 땅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사람들에게는 발아래 밟을 낙엽이 필요하고 낙엽은 밟혀질 발걸음, 삶의 무게가 필요한 건 아닐까. 제대로 썩어 이미 땅으로 돌아간 꽃잎과 낙엽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세민은 눈앞에서 스러져 간 얼굴들을 떠올렸다. 뜨거운 물이 눈으로 차 올라왔다. 세민은 고개를 들고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


세민이 유년시절을 보낸 동네는 명문학군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곳으로, 유치원은 물론 그 이전 나이부터도 엄마들의 열성이 대단했다. 엄마들은 ‘육아’ 라는 대의명분 하에 열렬히 뭉쳤고 또 각자 맹렬히 흩어졌다. 유치원의 이름은 ‘GB 유치원’ 이었다. 영어로 Girls and Boys 라는 뜻도 되고 유치원이 위치한 ㅇㅇ동의 영어 이니셜 GBP 의 앞 두자리를 따온 것이기도 했다. 원장은 당시 드문 편에 속했던 유학파 출신, 그것도 전인적인 교육으로 유명하다는 영국의 써니 힐즈 Sunny Hills 교육 시스템에서 연수를 받은 사람이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허투른 말로 상술을 도모하지 않는 원장에 대한 학부형들의 신망은 높았다. GB 유치원은 소위 ‘통합적’ 교육을 지향하는 커리큘럼이 교육의 특징이나 자랑이었다. 영어, 산수, 미술, 이런 식으로 과목이 나뉘어진 게 아니라 모든 활동에 모든 과목, 각 과목의 핵심과정이 녹아져 있었다. 예를 들어, 새에 관한 수업이라면 먼저 새를 그려보고, 새의 종류에 대해 배우고 습성에 대해 배우고 여러 마리의 새를 셈해보며 새를 우리 말로 읽고 말하고 쓰며 영어로 읽고 말하고 쓰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새에 관한 노래를 불러보는 것이었다. 학습은 점심시간으로까지 연장되었다. 예를 들면 새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진 그 날은, 작은 공룡 모양의 치킨너겟을 먹으며 모든 공룡의 시조인 ‘새’, 시조새에 대한 멘트로 새의 날갯짓을 마무리 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의 소재를 다루면서 그 안에 언어가 있고 과학이 있고, 산수와 음악, 역사까지 버무리는 교육과정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로서는 GB 유치원만의, 독창적인 것이다시피 한 것이어서 쇄도하는 신입생 문의로 원장은 즐거운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 파격적이고 신선한 커리큘럼은 곧 입소문이 나서 GB 유치원의 입학 및 전학대기생의 목록은 늘 꽉꽉 차 있었다. 학부모들은 이러한 GB 유치원의 프로그램을 존중하며 잘 따라주었다. GB 유치원은 원장과 학부모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은 교사들도 신명나게 일하는 곳이었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살구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 울려 퍼지는 피아노 반주와 합창소리에 아이들의 웃음이 햇살처럼 묻어나는 행복한 유치원이었다. 


*


GB 유치원에서 단 한 명 웃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면 바로 세민이었을 것이다. 어린 세민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표정을 설명해보라고 했을 때 엷게 표백된 색종이에 비유했을 것이다. 감정을 동력 삼아 내재된 생명을 발동시켜나가는 하나의 생명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에너지로 작동하는 오토마타의 느낌. 다섯 살, 여섯 살난 아이에게서 공적이라든가 공식적이라는 인상을 받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세민의 표정에서는 의심스럽고 또 의아하게도 그런 단어들이 연상되었다. 체육활동 시간에 운동기구를 사용할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는 세민의 모습은 마치 바람 부는 서늘한 언덕에 미동 없이 서 있는 목각인형 같았다. 원장과 세민의 매화반 담임 선생님은 학부형 개별 면담에서 우려 섞인 말을 조심스레 건네기도 했다.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문득 떠 오른 단상을 단호하게 물리치다가도 혹시나 정신병력을 가진 삼촌 때문은 아닐까, 내 딸에게까지 유전적인 영향이 있는 건 아닐까, 은옥은 제법 심각하게 의심해 보기도 하였다.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법대에서 수재라는 소리를 듣던 세민의 작은 삼촌은 군 입대 후 유독 적응이 힘들었다고 했다.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에 적당한 의사표현도 하지 못한 채 그를 교묘히 괴롭히는 동료병사들의 소행을 그저 꾹꾹 참고만 지내다가 그는 어느 날 그야말로 ‘폭발’한 것이었다. 교관들로부터 흠씬 돌려 맞은 후 정신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 세민의 삼촌은 얼굴의 상처는 거의 아물 무렵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환청이 들리고 계속되는 악몽으로 인해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삼촌은 결국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었다. 입대 전 다니던 지방 국립대에 복학 했으나 한 학기를 넘기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겨우 겨우 퇴원한 후에는 아버지, 그러니까 은옥의 시아버지가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약 포장하는 일을 했다. 그런데 그는 약 다리는 냄새를 못 견뎌했다. 약탕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광경을 보고는 담배꽁초로 자신을 학대하던 선임하사가 자기를 죽이러 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유치원에서 하원한 후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있는 세민을 바라보며 은옥은 가슴 한 켠 걱정이 피어올랐다. 세민인 절대 그런 경우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영리한 아이라 가끔은 혼자만의 생각에 침잠해 있느라 그런 거겠지. 혹시 세민이를 낳을 때 병원에서 잘못된 처치를 한 건 아닐까, 산소공급이 부족해서 뇌손상이 있었던 건 아닐까, 출산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곰곰 따져보았다. 설마, 그럴 리는 없었겠지. 설마. 세민은 도무지 말이 없는 아이였다. 왜 웃지 않을까, 왜 저런 엉뚱한 표정을 지을까. 얼마 전 가족사진을 찍었을 때 답답한 마음에 은옥은 세민의 허벅지를 쿡 찌르며 좀 웃어, 눈치를 주었다. 은옥이 먼저 웃는 모습을 지어보이며 따라하라는 시늉을 했지만 세민의 표정은 영 어색하기만 했다. 아니,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세민의 얼굴은 더욱 묘하게 일그러져갔다. 은옥은 큰 실망과 절망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세민이네는 세민이가 세 살되던 무렵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그 전에는 도시 근교에 있는 땅이 밟히는 주택에서 살았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은옥은 꽃 가꾸는 것을 즐겨해서 자그마한 화단을 마련해 각양각색의 꽃들을 심어 놓았다. 햇볕이 들면 어린 세민을 안고 화단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은옥의 가장 큰 기쁨이자 낙이요 취미였다. 세민아, 저 꽃 좀 봐, 너무 예쁘지, 아 이쁘다, 은옥이 말하자마자 세민은 얼른 손을 뻗쳐 꽃의 마디를 똑 따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은옥은 세민의 손등을 탁 소리 나게 때리며 주의를 주었다. 그러면 안돼, 이쁜 꽃이 아야, 하잖아.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는 꽃인데. 또 그러면 엄마한테 혼난다. 아파트로 이사온 후 은옥은 생활의 편리함과 쾌적함에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었다. 다만 꽃을 심고 가꾸고 화단을 일구지 못하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결혼 전 은옥은 중소기업인 해운회사에서 회계 일을 했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여대 약학과에 진학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중퇴를 하고 친척의 추천으로 들어가게 된 회사였다. 혼령기가 되어 맞선으로 만나 결혼에 이른 남편은 공대를 나와 무역회사에서 의료기기를 수입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월급과 지위가 탄탄해서 생활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남편은 자상한 성격에 손재주가 많았는데 섬세한 기계를 다루듯 정교하게 식재료를 조리해내는 요리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그가 가장 즐겨하는 요리는 매운 닭찜과 돼지고기 바비큐였다. 부부는 종종 각자 맥주 한 캔씩 앞에 놓고 유쾌한 저녁식사를 했다. 은옥과 남편은 9살의 나이차가 났는데 외모로만 보면 동갑내기처럼 보일 정도로 은옥의 남편, 즉 세민의 아버지는 풋풋한 인상의 동안이었다. 주변에서도 자상하고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누가 보아도 화목한 집이었고 행복한 결혼생활이었다. 


은옥은 세민이 유치원에 진학하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었다. 남편이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게 되어 안정적인 봉급을 가져다주게 된 이유가 가장 컸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야무진 입, 코끝이 뾰족한 코를 가진 미인인 은옥은 무슨 일을 하든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편이었다. 친정 아버지가 하시던 ‘집장사’를 어깨 넘어 배우던 은옥은 ‘부동산’ 이란 신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신의 영민한 머리와 친정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은 감각으로 한 번 승부를 걸어볼 만 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은옥은 살고 있는 아파트 동네상가에 부동산 사무실을 내고 공인중개사자격증을 보유한 직원을 고용하였다. 자신도 틈틈이 중개사 공부를 하였으나 진도는 더뎠다. 은옥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화병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생화 대신 화려한 색감의 조화가 한 다발 들어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생화랑 꼭 같을까, 은옥의 감탄을 하며 화병의 조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래 되어 먼지가 쌓이거나 오래 되면 빛이 바래지겠지. 은옥은 짬이 나는대로 구입처에 가서 조화의 보관법이나 세탁방법에 대해 물어볼 참이었다. 접대용  탁자 위에는 “사람의 아들” 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들이 놓여 있었다.


도시로 이사 온 후 은옥의 일정은 하루하루가 공사다망했다. 동네 엄마들과의 모임과 취미활동은 무궁무진하고 흥미진진했다. 동네 중국집과 일식집의 점심시간은 젊은 엄마들의 이야기꽃으로 늘 풍성했다. 신흥 중산층 동네의 활기와 열정은 여름날의 화단처럼 싱그럽고 향기로웠다. 정식인가를 받은 어린이집이 생기기 이전의 일이어서, 바쁜 엄마의 숨통을 트여주기 위해 세민은 유치원에 2년 먼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고는 2년을 다녔다. 세민의 집에는 유치원 졸업앨범이 두 권 꽂혀 있었다. 첫 번째 앨범의 속지를 넘기다 보면 힘없는 표정의, 여자아이같이 생긴, 아무리 봐도 여자아이임이 틀림없는 짧은 단발의 유난히 작은 입을 가진 아이가 장난감 권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중에 유치원 관련자에게 물어보니, 언젠가부턴가 여자아이들이 갖고 놀 수 있는 인형들이 하나 둘 망가져 숫자가 모자라게 되었는데 아마도 세민이는 그 인형을 돌아가며 골고루 차지하여 노는 방법도 몰랐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나보다 라고 했다. 그래서 아예 인형놀이를 포기하고 넉넉한 수량이 확보되어 있는 장난감 군모를 집어쓰고 장난감 총을 들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앨범 속의 사진을 본 은옥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선생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미처 그런 점들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 그깟 인형, 얼마나 한다고. 은옥은 세민에게 마론인형, 니나인형, 모니카, 에밀리 인형 등 이름이 있는 인형이란 인형을 죄다 사 주었고 인형들마다 예쁜 옷을 사서 입혀 주었다. 어떤 인형은 은옥이 코바늘로 레이스를 떠서 직접 옷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세민의 방에 기거하는 인형들이 많아지자 인형의 집이 들어왔고 인형들의 벽이 생겼다. 인형의 사회가 생기고 인형들이 숲을 이루었다. 세민은 말없는 인형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인형들은 커다란 눈을 방긋방긋하며 누워 있을 뿐이었다. 세민은 아파트 3층 계단을 내려가 집 앞 작은 공원의 벤치에 가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벤치 옆에는 꽃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온 세민의 유치원 가방에서 그 날의 가정통신문을 발견한 은옥은 가슴이쿵쿵 뛰었다. 가정통신문 제목은 ‘GB에서 집으로’ 였는데 내용인즉 ‘예쁜 어린이선발대회’ 참가신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은옥은 대학 때 메이퀸이었으며 직장을 다닐 때도 사내미인대회에서 ‘진’으로 뽑힌 적이 있는 자타공인 미인이었다. 은옥은 어딘가에서 ‘미인’ 이라는 단어만 들려오면 흠칫 놀랐다. 자신을 부르거나 지칭하는 걸로 생각했던 것이다. 어떤 모임에 가게 되면 자신보다 더 예쁜 여자가 있나 살펴보는 것이 첫 번째로 하는 일이었다. 자신보다 예쁘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있으면 그곳에 머물러있는 내내 그 여자를 힐긋힐긋 바라보게 되거나 손거울을 꺼내 수시로 화장이 잘 되었나, 이 각도에서의 내 모습은 어떻게 보이고 있나, 를 확인하느라 안절부절했다. 스스로도 그러지 않으려고, 의연해지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모임에서 일찍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외모는 물론 타인의 외모에 대해서까지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자신을 견뎌내기 힘들었던 까닭이었다. 아마도 화단이 있는 집에서 살 땐 꽃과 화초를 가꾸는 것으로 상당부분 해소가 되었던 것도 같았다. 아름다움을 도모하고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하는 것은 여자가 가질 수 있는 더없는 즐거움이지, 화단에서 은옥은 기쁨으로 충만했다. 꽃들은 어쩌면 이름도 그렇게 예쁜지. 매화, 홍매화, 벚꽃, 철쭉, 개나리, 진달래, 생강나무꽃, 목련 같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봄꽃들로부터 화려하고 고혹적인 여왕 같은 장미, 여름 꽃들의 릴레이. 국화와 코스모스로 이어지는 은은한 가을꽃의 우아한 퍼레이드. 동백꽃, 수선화 등 기개가 처연한 겨울 꽃들의 자태.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 은옥이었기에 딸이 태어나자 누구보다도 기쁘고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들은 원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닮아 분명 예쁠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못해봤던 것들을 딸과 함께 원 없이 해봐야지, 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던 정윤희를 닮으라고 태명을 윤희, 라고 지으며 정윤희의 사진을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음식도 예쁘고 좋은 것만 가려 먹었다. 식탁 위를 항상 향기로운 제철 꽃들로 장식했다. 세민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딸아이는 흰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인 은옥을 많이 닮은 것 같았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은옥의 분위기와는 좀 다른 면들을 발견되었는데, 이를테면 은옥이 서구형 미인이라고 할 때 세민은 동양형 얼굴이었달까. 그것은 좋게 해석한다고 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은옥처럼 야무지고 애살스러운 면은 도통 없고 말도 없고 무뚝뚝한데다, 더군다나 좀처럼 꽃 한 송이 피어날 것 같지 않는 언 땅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딸 세민. 딱딱하고 어두운 표정의 세민을 볼 때마다 은옥은 마음에 안타까움을 더해갔다. 세민은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예쁜 옷이나 장신구에도 욕심을 갖는 일이 없었다. 머리 빗는 것도 귀찮아했고 치마나 원피스, 드레스 입는 것을 불편해했다. 아무리 ‘이거 먹으면 예뻐진다.’ 고 회유하고 달래고 꼬셔도 당근이나 브로콜리 같은 채소반찬에 손도 대지 않았다.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은옥은 ‘예쁜 어린이선발대회’ 공문을 반갑게 받아 든 것이었다. 세민이에게 여성성을 심어줘야겠어. 이번이 좋은 기회야!


*


구름다리를 건너자마자 SS 문화센터가 엄중한 위용을 나타냈다. 여류문인의 이름을 딴 현대식 건물이었지만 미관이라든가 디자인 측면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자연경관과 구조물의 조화가 별로라고 세민은 생각했다. 1층 로비와 북카페는 한산했지만 2층에 위치한 회의장은 인파로 붐볐다. 이미 몇 시간전부터 열기가 뜨겁게 지펴진 듯 했다. “GB 아파트 주택재건축정비사업조합 2017년 정기총회”. 날씨가 풀렸다고는하나 사람들은 어둡고 무거운 옷차림이었다. 자신의 재산권을 지켜야한다는 결의와 다짐을 켜켜히 껴입고 있었다. 세민은 참가등록을 하고 손목에 띠를 두른 후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현직 시의원이란 사람이 사회자로서 개회를 시작했다. 국민의례. 요즘 같은 시대에 아직 이런 게 남아있나, 생각한 순간 “나는 대한민국 국기 앞에서 국민으로서 성실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렇게 한 마디 하고 끝나버렸다. 역시 세태는 반영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보군, 세민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맨 앞자리에 앉아 미리 등기우편으로 받았던 회의자료 책자를 넘겨보았다. 


*


세민의 발육이 느려 왜소한 체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은옥은 세민이 일곱 살 되던 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세민이 한글을 빨리 깨치고 얼마 배우지 않은 피아노로 유행가 멜로디를 곧잘 응용해서 치는 둥 영민한 모습을 보이자 자신감과 함께 욕심이 생기기도 한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나이가 많아 그러니 참작해 달라며 동사무소 직원에게 사정사정을 했지만 이제는 학령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힘들다는 답변을 받자 은옥은 잠시 후 결심한 듯 세민의 출생일을 변경신청을 하고 벌금을 물었다. 그리하여 세민의 공식나이는 실제보다 한 살 많은 나이가 되었고 그 해 입학했다.


세민이 초등학교 첫 수업이 시작되던 바로 그 날 은옥은 부동산 사무실을 여고친구에게 인수인계하고 세민의 뒷바라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은옥의 전폭적 지지 속에 세민은 반장이 되었다. 그러나 심약한 세민에게는 매일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세민은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얘들아 조용히 해, 차렷, 경례를 외치는 조용한 몸짓의 반장이었다. 다행히도 세민의 자그마한 체구라든가 힘없는 목소리를 문제 삼는 아이나 학부모는 없었다. 1학년 반장이라는 타이틀은 꽤나 상징적인 것이어서 누구나 탐을 낼만한 성질의 것이었지만 반장이 통솔력이 없네, 야무지지가 않네, 따위의 불만사항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반 아이들에게 자주 간식을 배달시켜 먹이고 담임에게도 쏠쏠한 선물을 주는 은옥의 깨알같은 정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등굣길에 세민은 어떻게 하면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을까, 어느 음절에 강세를 두어야 떠드는 아이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얘들아, 잠깐만, 하고 말할 때 얘들아 와 잠깐만의 사이에 얼마간의 쉼을 두어야 할까, ‘아’의 음은 어떤 높이로 말해야 할까. 얘들아? 하고 높여야 하나, 얘들아! 하고 외쳐야 하나. 아니면 얘들아~ 하고 늘려야 하나. 그러던 어느 날. 오늘 전학 온 학생이야. 이름은 정미. 손정미. 정미는 성북동이란 곳에서 이사 왔단다. 다들 반갑게 정미에게 인사하자. 안녕, 정미야~. 1학년1반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라 다함께 안녕, 정미야~ 를 외쳤다. 세민이 두 눈에 정미가 한가득 들어왔다. 정미는 키가 크고 마른 몸집의 아이였다. 아마 반에서 가장 키가 컸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정미는 키만 큰 게 아니라 머리도 크고 눈도 크고 입도 컸다. 정미의 모습은 어딘가 암사자를 연상케 했다. 정미의 피부는 연한 갈색에 가까웠는데 세민에게는 황금색처럼 느껴졌다. 부드러운 웨이브로 부풀려진 정미의 머리는 따뜻한 가을날의 햇볕 같았다. 긴 머리는 단호하게 묶여 있었다. 팔과 다리, 손과 발, 손톱 등 기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길었다. 긴 머리와 팔과 다리가 허공을 가르며 우아하게 움직였다. 키가 작은 세민과 키가 큰 정미는 서로 먼 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민은 오래지 않아 정미의 마음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창가 쪽 맨 앞자리에 앉아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멍하게 있는 세민이 문득 환기 되어 옆을 돌아보면 정미가 와 있었다. 세민을 툭 치며 얘! 그러고는 하하, 호탕하게 웃는 정미. 정미는 세민이 기가 약한 반장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린 듯 했다. 세민이 아이들을 향해 말 하는 모습을 몇 일 동안 지켜보며 빙그레 웃음을 짓던 정미가 전학 온 지 일 주일째 되던 날. 그 날도 떠드는 아이들을 향해 머뭇거리고 있던 세민을 한 번 바라본 후 정미는 싱긋 웃으며, 얘들아, 잠깐만, 하고 말했다. 놀랍게도 정미가 교실 한가운데 허공을 향해 쏜 말의 음역은 정확하게 아이들의 청각 레이더에 꽂혔다. 아이들은 멈칫, 했고 세민은 아이들에게 전달해야 할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쟤, 뭐야, 반장은 뭐 하고, 하는 투의 반응은 없었다. 아기사자 같은 아이들은 그저 자기보다 상위에 있는 본능적인 위엄을 알아보았고 순종했을 뿐이었다. 세민에게는 그저 부럽기만 한 일이었다. 아이들의 주목을 이끌어낸 정미를 향해 세민은 고맙다는 눈짓을 했다. 그것은 경외의 눈빛에 가까웠다. 


*


제1호 안건, 2호, 3호, 4호 안건의 상정이 끝나고 조합장 선거를 위한 후보들의 유세가 시작되었다. 회중은 숨을 고른 채 듣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십 수억의 재산이 걸려 있는 재건축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건너 편 단지는 GB 단지보다 재건축 추진이 늦게 시작되었는데도 벌써 구와 시의 사업승인을 얻어냈다. 2년이나 일찍 출발한 GB 단지는 아직도 지지부진이었고 집행부의 무능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조합장 선출을 위한 총회가 마련된 것이었다. 


“저, 김ㅇㅇ을 다시 믿어주십시오. 완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제가 계속해야 업무공백을 메꿔 2년 안에 사업승인을 따낼 수 있습니다.”

“김 **입니다. 저는 사업승인 때까지 한 푼도 받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건설업에서만 30년 경력입니다. 전문가에게 맡겨주십시오.”

“김 &&입니다. 재건축 조합의 이사로 재직하며 조합장이 하지 않는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으며 구, 시의 인맥을 활용하여 긴밀한 업무협조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재건축 사업상 발생하는 각종 비리가 염려되신다면 제가 답입니다.

“세 명의 김 후보들. 다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빚이 많아서 조합장 자리를 꿰차 이익을 챙기려 한다는 비방문자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믿지 마십시오. 저는 모든 과정을 단축시켜 1년반만에 재건축 사업승인을 얻어내겠습니다.”


소리를 내지르며 유세하는 후보들을 청중은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 모인 조합원들은 강남의 노른 자리 땅 수십억 아파트의 소유주라기보다는 그 외 지역의 버스 정류장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주머니, 아저씨 같은 수수하고 평범한 모습이었다. 대다수의 조합원들은 투표용지를 쥐어 들고 대다수의 조합원들은 누구를 찍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세민은 다음 일정을 위해 서둘러 책자에 나온 조합원 후보들의 인상과 이력을 살피며 3번 후보를 마음에 두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가장 젊고 이권과 무관해 보이는 사람을 찍어야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3번 후보가 그에 부합되는 것 같아 투표지의 그 후보 옆 동그라미 안에 색칠을 해 넣었다. 옆 자리에 앉아있던 중년여성이 세민의 용지를 힐긋 쳐다보았다. 세민은 옆자리 여성과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3번 괜찮나요, 여성이 누가 들을세라 낮고 가는 목소리로 세민에게 물었다. 글쎄요, 제 생각엔 젤 성실하고 능력 있어 보이네요, 세민이 말하자, 옆 자리보다 한 칸 더 멀리 있던 여성이 눈을 찡끗했다. 그녀는 ‘선거관리위원회’ 명찰을 달고 있었다. 선관위 명찰을 단 여성은, 나는 말하면 안되는데, 를 몇 번 말한 후 음, 잘 보셨네요, 좋아요, 하며 세민과 다른 여성에게 두 눈을 꿈벅 했다. 세민과 옆 자리 여성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웃었다. 


*


세민의 부모가 미국이민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세민이 중학교 입학할 무렵이었다. 나쁜 일들은 몰려서 온다던가, 사람 좋은 세민의 아버지가 친구의 보증을 잘못 섰다가 친구의 파산, 도피로 인해 큰 경제적 손실을 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파트에서 나아가 땅 투기에 손을 댄 은옥이 사기를 당해 살고 있던 아파트를 저당 잡히게 되었다. 친정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빚쟁이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은옥과 남편은 법적으로 이혼절차를 밟기로 하였다. 재산을 분리하여 빚쟁이들을 따돌리려는 의도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에는 위험요소가 너무도 많았다. 백방으로 이민의 방법을 알아보던 중에 세민의 부모는 한차례 더 사기를 당했다. 마지막 시도로, 은옥은 비자 얻기가 쉽다는 종교인 비자 취득을 위해 신학대학원에 등록했다. 브로커를 통해 학교를 마치지 않아도 졸업장을 얻을 수 있었다. 은옥의 남편은 한 달만에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세민을 미국인 가정에 양녀로 입양되기 위한 서류가 꾸며졌다. 새출발을 위해 세민의 가정은 전재산을 현금화 하였다. 성실한 가장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던 고가의 턴테이블과 가전제품 그리고 피아노를 팔았다. 보증과 땅 사기, 이미 사기, 그리고 최종 이민 서류작업에 가족소유의 아파트들이 한 채, 두 채 넘어갔다. 마지막 남은 아파트가 그들이 서울에 처음 올라와 장만한 GB 아파트였는데 그것만은 보전할 수 있었다. 은옥은 임신한 여동생에게 집문서를 맡기며 신신당부했다. 이게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재산이야, 잘 관리해주렴. 꼭 부탁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세민이를 부탁한다. 가족이란 너 뿐 아니니. 세민의 가족은 기적적으로 출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 도착한 세민의 부모는 다른 이민자들처럼 닥치는대로 일했다. 은옥은 낮에는 가게에서 캐셔로, 은옥의 남편은 조리사자격증과는 무관하게 세탁소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 갓 이민 온 다른 남자들은 한국 생각에 젖어 체면을 따지며 불만의 나날을 보내는 게 다반사인데 묵묵히 일해주는 남편이 은옥은 고마웠다. 스무살 때 폐결핵을 앓은 적이 남편의 기침이 잦아진 것이 걱정이 되긴 했지만 곧 원하는 식당 주방장 일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성적인 성격에 여전히 왜소한 체격의 세민이도 그럭저럭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듯 했다. 고도근시였던 세민은 은옥의 설득으로 한국에서 썼던 두꺼운 안경을 벗고 콘택트 렌즈를 끼기 시작했다. 안경을 벗으니 비로소 딸 같고 여자아이 같았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지친 몸을 누이며 은옥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민이가 답답한 면이 있긴 해도 수학도 월등히 잘 하고 영민한 면이 있는 아이니까 아이비리그 대학도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대학학비야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는 곳이 교육의 천국 미국이 아니던가.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 좋은 집안의 근사한 청년을 만나 번듯하게 결혼해서 사는 세민의 모습을 그려보니 은옥은 꿈만 같았다. 수영장 딸린 집은 아니더라도 작은 마당에 화단이 있는 집은 언제쯤 장만할 수 있을까. 화려한 색상의 꽃들이 핀 화단을 상상하며 은옥은 잠들곤 했다. 


*


학교가 끝나기 전의 교실은 분주했다. 햇살의 조명을 받아 높이 들뜬 먼지들 밑으로 바닥의 뭉치들이 구석구석을 둥글게 굴렀다. 세민은 다시 한 번 입으로 되뇌었다. 생일 맞지, 생일 축하해, 내가 만든 거야. 어, 생일 인 거 같아서 만들어봤어, 맘에 들어? 응, 어젯밤에 만들었어. 세민은 맘을 먹고 아이들 사이를 가로질러 교실 뒤쪽에 있는 정미에게 나아갔다. 먼지 사이로 길이 나고 엑소더스 같은 그 위에 금빛 볕줄기가 드리웠다. 정미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선 정미의 모습은 세민이 이제껏 연습해 온 말들을 잊게 만들었다. 멈칫 거리던 세민은 얼굴이 빨개진 채 어, 생일 축하해, 하며 준비해 온 카드와, 리본으로 만든 장미 한 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너무 이쁘다, 이거 너가 만든 거야? 활짝 웃는 정미의 얼굴은 너무나 환하고 밝아서 세민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정미의 웃음을 만들어내는 근육들은 정교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초상화였다. 아프리카 초원 위에 뜬 반달, 황금빛 갈대 숲. 고고한 자태의 암사자가 돌보는 새끼사자들. 그녀가 거느리는 무리. 그 중 병약한 작은 새끼 암사자 한 마리. 고마워, 하며 와락 두 팔을 내밀어 끌어당기는 정미에게 세민의 작은 몸이 털썩 안겼다. 주위에 있던 친구들은 그 장면을 힐긋 바라보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곧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누군가, 반장, 하고 부르는 소리에 정미는 다시 한 번 세민에게, 진짜 고마워, 라고 말하고 그 곳을 떠났다. 세민은 자신이 정미에게 한 말을 다시 나즈막히 내뱉어보았다. 어, 생일 축하해. 집으로 오는 길에 학교 담벼락에 피어 있는 빨강색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가지에 박힌 촘촘한 가시들을 세민은 처음 보았다. 세민과 정미가 다시 같은 반이 된 4학년 때의 일이었다. 찬바람이 여러 번 불고 세민이 중학교 2학년 되던 해 세민의 가족은 미국으로 떠났다. 


*

“자, 다음은 이사 후보들의 자기소개가 있겠습니다.” 이사는 15명의 후보 중 10명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후보들 면면이 거기서 거기겠지,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듯 세민은 책자의 종이를 넘겨보았다. 나와 있는 내용을 토대로 대강 골라 이름 옆 동그라미를 까맣게 메꿔 투표함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거기서 어떤 이름을 보고 흠칫 놀랐다. 한 해 앞선 출생연도, 잊어버릴 수 없는 그 날짜의 생일. 시의원 출신. 인터넷 독립언론사 대표. 무슨무슨 컨설팅 자문위원. 35년째 GB 아파트 실거주. 한 치의 의심도 무색하리만큼 완벽한, 기억하는 예전 친구의 현재 프로파일이었다. 세민은 설계사무소에서 예정되어 있는 고객미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잠시 후 좀 늦겠으니 이실장님이 먼저 응대하고 있으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이제부터 단상을 제대로 응시하겠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5번 후보 안정미입니다. 이곳 GB 동은 저의 학창시절과 사회 초년생 때의 소중한 추억이 모두 남아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GB 아파트는 저의 오랜 추억만큼이나 빛 바랜 아파트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2년여 기간 동안 재건축 조합설립을 위해 추진위원이 되어 희망을 가져 보았지만 더디고 지난한 진행과정 속에 많은 실망에 실망을 거듭했을 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사업추진이 지연되는동안 법이 바뀌어 초과이익환수금이라는 복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조합원들이 부담해야할 추가금액이 얼마가 될지 현재로서는 감히 추측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이 저희 조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입니다. 저의 전문성과 제가 그동안 쌓아놓은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구의회, 시의회 및 시장과 긴밀한 협조체계를 이루어 이 난국을 타개해나가는데 온힘을 다하겠습니다. 


모범답안같은 정미의 유세내용을 보며 세민은 표효하는 암사자의 느릿한 몸짓을 연상했다. 여전했다. 배경은 연보랏빛과 주황색이 혼합된 초원의 노을이었다. 정미에게 건네주었던 보라색 리본 장미가 생각났다. 마음 한 켠 번지는 이 느낌은 뭘까, 세민은 곰곰 생각해보았다. 세민을 비롯한 여기 모인 이들, 정미를 포함한 앞장 선 이들에게 자신의 집과 재산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것이 전부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직 일부에 불과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기 모인 사람들이 가진 것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재건축이 진행되네 마네, 지연되네 마네, 해도 결국 금싸라기 동네에 집 한 채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세민은 은옥의 부동산 사무실 탁자에 올려져 있던 책들을 기억했다. ‘난장이가 쌓아올린 작은 공’. 그때의 충격은 세민을 계속 사로잡았다. 힘든 이민생활 속에서도 지켜낸 부모의 ‘재건축 딱지’ 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예전 살던 동네에서 꽃을 가꾸며 살아보는 것을 그토록 소원했던 은옥은 지난 해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은옥의 남편, 즉 세민의 아버지는 폐암으로 그 두 해전 사망했다. 세민이 대학을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에서 직장을 잡아 다닌 지 삼년 째 되던 해였다. 은옥이 유언처럼 남긴 말로 인해 세민은 한국에 나오기로 결심했다. 너 어렸을 때 살던 동네로 가, 한국에서 살아. 우리는 할 수 없어서 이민오기는 했다만. 그래도 너 교육 시킬 수 있어서 감사하지. 한국에서 번듯하게 살아. 재건축 된다니까 너 하나 사는 데는 평생 지장 없을 게다. 엄마 소원이야. 꽃처럼 예쁘게 자라서 좋은 신랑 만나 행복하게 사는 거. 그래도 엄마한텐, 꽃 중에 장미가 제일이더구나. 장미로 멋지게 장식된 네 결혼식을 보고 싶었는데 내 운은 여기까지인가보다. 우리 세민이, 사랑한다.


*


세민은 정미의 이름 옆에 까맣게 색을 채워 넣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집어 넣었다. 될 거야, 정미는. 잘 될 거고 잘 하겠지. 골치 아프긴 하지만 결국은 다 잘 될 거야. 모두 잘 될 거야. 마음이 홀가분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했다. 구름다리를 다시 건너며 세민은 담벼락의 장미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저 나무들에 꽃망울이 맺히고 피어 향기가 나기 전에. 세민은 부동산중개소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 GB 아파트, 팔려고요. 부동산 직원은 깜짝 반기면서도 미심쩍어 하는 모습이었다. 급전이 필요하신 거에요? 이제 새로운 집행부 뽑히고 나면 일사천리로 진행될텐데. 지금 파시면 후회하실 지도 모를텐데요... 


꽃을 심고 싶어서요. 화단을 가꾸고, 정원이 있는 집에 살고 싶어서. 장미가 있는 집에 살려구요.  







https://www.youtube.com/watch?v=OR3iL1gzT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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