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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지 Aug 31. 2017

[심리] 연애의 진화(그러나 사랑은 I)

다자연애에서 무성애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 어찌 보면 재생산을 위한 교류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앞으로 이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 주목된다.


이제 인간은 번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에는 흥미를 잃었다. 쾌락이 우선. 그 쾌락을 생화학적으로 해석하자면 도파민에서부터 각종 안정 및 애착과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복합적 호르몬들의 영향일텐데. 점차적으로 '도파민 분비' 하나로 수렴되는 양상.


소설, 영화에서 보는 순애보, 순정이 묘사된 '사랑'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거의 박제된 형태로만 남아 있는 듯.


자유로움과 성숙에의 강박은 전통적인 연애방식으로부터의 탈피와 해체를 가져오고 있는 듯. 하긴 소설, 영화에서 보는 순애보, 순정이 묘사된 '사랑'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거의 박제된 형태로만 남아 있는 듯 하다. 그 영화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조차 신봉하지 않는 가치관. 일상생활에서 이미 멸종된 오래된 역사. 그야말로 허구가 만들어낸 허상. 이제 '인간'들은 제약 없고 약속 없는 순간적 관계를 지향하며 모든 판단가치기준이 '자유' 와 '성숙' 에 놓여 있다. 양성애자도 이젠 옛말. 범성애자로 진화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사람을 나도 사랑하는 것.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다.  


다자연애는 asexual (무성애적) 연애로의 전환기였을까. 관계의 대상을 분산시켜 성 자체를 자유로움의 영역 안으로 혹은 바깥에 놓아버리는 것이다. 무성애자들이 생겨난다. 기존의 플라토닉 러브가 아닌, 아련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성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닌, 전반적 성행위 자체에 관심이 없는. 오로지 "대상" 이 있을 뿐이고 그 대상은 "생명력" 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뛰어넘는다. 가상현실 속의 연인. 어떤 활동 그 자체. 홀로그램으로 만나는 보칼로이드. 그림을 그리며 도파민의 폭포에 입수하고 노래를 부르며 오르가즘 샤워를 한다. 의존이란 의미에서의 티끌만큼의 애착도 배척한다. 순간을 온전히 누리는 자유로움과 성숙. 모두 다 사랑하고 모두 다 수용하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


완벽한 독립적 개체. 완전체로의 지향일까. 스쳐가는 정도로만의 너와 나의 관계. 관계의 지속을 꿈꾸지 않는다. 성역할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단정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그 순간의, 서로 좋아한다는 감정은 어떻게 표현될까? 눈빛으로?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체념의, 비장한, 그래서 더 짜릿한 강렬함으로? 혼자 있는 시간에 어떤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바람, 갈망이나 열망이 제거된 유희에 지나지 않을까? 질투란 감정마저도 '널 좋아하기 때문에' 의 즉흥적 표시일 뿐, 지속적인 관계로의 욕망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러면서도 '운명' 이 존재한다는 걸 믿고 타로점궤가 주는 모호한 해석의 영역을 맹신하는 20대들과 나눈 대화. 신선하고 흥미롭다. 연애의 미래? 미래의 사랑방식? 앞으로 맞닥뜨려질 개인의 사회(indivisual society, society of individuals)는?


a 에서 an- 으로, 그리고 이제는 전혀 다른 무(無)의 a 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목도하며 전율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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