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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씨일기 Feb 25. 2024

마른 하늘에 파이브가이즈

매일 쓰는 짧은 글: 240225




바쁜 일주일을 보내고 오랜만에 차분히 집에 있었던 오늘. 주말인데도 데이트를 나가지 않는 오빠에 의아해 하던 찰나였다. 점심을 먹을 때쯤 오빠는 갑자기 엄마에게 와 오늘 더현대 옆에 있는 페어몬트 호텔에 하루 묵지 않겠냐고 묻는다. 무슨 일이지? 싶어서 상황을 보니 오래 사귀어왔던 여자친구와 헤어져 미리 예약해뒀던 호텔의 예약이 애매해져버린 것. 아마도 끝내 재결합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버티다 마지막 순간에야 현실을 직시하고 부모님께 예약을 양보하려 한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엄마도 나도 어안이 벙벙하다가 일단 알겠다고 하고 아빠에게도 몰래 이 일을 전달했다. 나는 오랜 연애의 종말의 마음을 알기에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 엄마 아빠 둘이 다녀와~ 하고 억지 쾌활함을 끌어올렸는데, 엄마는 갑작스런 아들의 이별 소식에 마음이 많이 안좋아진 듯 보였다. 나이가 꽉 찬 오빠의 결혼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오후 내내 생각이 잠긴 얼굴로 거실에 우두커니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나도 어쩔 줄 몰라 그냥 옆에 같이 있어주기만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은 벌어졌고 호텔의 예약비용은 꽤나 비쌌으며 누군가는 가서 묵어야 한다. 애써 기운을 내서 엄마아빠를 호텔로 보내려하다가 그럼 이렇게 된거 다같이 그 유명한 파이브가이즈에 도전해보자! 하면서 테이블링을 걸고 집을 나섰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호화스러운 방에 우리 4명 모두 우와, 우와만 연발하다가 시간을 맞춰 더 현대에 내려갔다. 바로 호텔과 연결되어있는 더현대. 편한 츄리닝 바람으로 여기에 오다니 부자가 된 마음으로 자본주의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지하로 내려갔다. 일요일인데도 생각보다 사람이 없어 순식간에 입장완료. 애초에 포장으로 해갈 마음이기 때문에 매장 내 자리 경쟁에서 자유로워서 땅콩만 냠냠 주워먹으며 오늘은 마음껏 먹자! 하며 제일 비싼 햄버거들로 잔뜩 시켜서 방으로 올라왔다. 테이블에 한가득 세팅해둔 햄버거, 그 유명한 파이브가이즈를 드디어 먹는구나. 정말 마른 하늘의 파이브가이즈였다. 





엄청 단 쉐이크와 엄청 짠 감자튀김과 엄청 맛있는 햄버거를 먹고 있자니, 아무렴 뭐 어떤가 싶다. 방은 2인실이지만 4명이 있어도 전혀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갑작스럽게 일상 속에 등장한 비일상이 마치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까지 들게 해줬다. 든든히 식사를 마치고 서로 즐겁게 햄버거가 맛있네, 감자튀김 양이 많네 하면서 웃으니 인생이 다 뭐가 있나 싶었다. 그렇게 같이 주말 저녁을 보내고 오빠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 아빠는 미리 앞당겨 받은 어버이날 선물을 내일 아침 조식과 사우나로 풀 코스를 즐기며 돌아올 예정이다. 어찌되었던 오늘의 파이브 가이즈는 내 인생의 최고의 햄버거 맛이었다. 아무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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