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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를 챙기기 위해 무기고로

by 왕씨일기


내가 본격적으로 도서관을 다녔던 것은 고등학생이 되고 난 후부터였다. 도서관 대출내역을 살펴보면 가장 오래된 기록이 내가 17살 때인걸 보면 말이다.


보통 그 나이대면 도서관을 가는 이유가 책을 빌리는 이유도 많겠지만 독서실의 개념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의 경우는 순수하게 책을 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MBTI 같은 것이 없었을 시절부터 나 스스로가 지독한 내향인인걸 잘 알았던 나는, 학교의 쉬는 시간마다 펼쳐지는 거친 동갑내기 친구들의 날뛰는 활력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 젊음, 그 열기.. 같은 동년배였을 나에게도 그 에너지는 너무 버겁게 다가왔다. 그래봤자 나 자신도 동갑으로 젊은 주제에 내 안에는 혼자 애늙은이기 자리를 잡고 있었던 듯하다(그리고 그 늙은이는 지치지도 않고 여태껏 잘 살고 있다). 조금은 그 열기에 숨이 막힐 때마다 나에게 있어 도망가기 쉬운 단 하나의 세계가 바로 책이었다.




요즘 흔히 말하는 '찐따' 그룹에 속하는 나는 얌전하고 조용한 학생이었어서 차분히 혼자 있고 싶었지만 또 혼자로 보이는 것도, 군중 속의 고독을 씹는 것도 힘들었다. 내가 먼저 나서서 말을 거는 것이 힘들어 항상 친구들이 나를 먼저 찾고 간택해 주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어떤 날에는 무난히, 또 무사히 쉬는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고 혼자 내 자리에 앉아 어쩔 줄 몰라하며 마냥 빨리 수업종이 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들도 많았다. 남의 시선에 한껏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었어서 혼자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 너무도 부끄럽고 외롭고 불안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부여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친구 많고 활발한 너희들이 나랑 말을 안 해주는 게 아니라 나는 책을 읽기 위해 스스로가 되기를 택한 거야,라고 어느 정도 자기 위안을 하며 말이다(이렇게 말하니까 친구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당시에 상대적으로 많이 수동적인 성격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있어도 수줍고 조용해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고 혼자 남겨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책이 없으면 학교를 가기가 어려웠다. 아니 약간은 무서울 지경이었다. 책은 내 보호막이자 방패, 나를 사연 있는 투명인간으로 보이게 만들어주는 나만의 무기였던 것이다. 쟤는 원래 저런 애야, 혼자 책 읽는 걸 좋아하더라고, 이런 프레임을 스스로에게 씌우기 위해 쓰는 무기. 그리고 그런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잔뜩 있는 무기고로 가야 했다. 처음 내가 도서관을 가게 된 계기는 그런 이유로 시작되었다.


책을 읽는 목적이 조금은 왜곡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저 단순히 읽는 시늉만 하며 쉬는 시간을 보낼 수는 없으니 시끄럽고 이래저래 정신 집중하기 어려운 교실에서도 술술 잘 읽힐만한 책들을 적당히 잘 골라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에 있던 작은 도서관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고 처음으로 집 근처에 어떤 도서관들이 있는지 검색을 해 굳이 찾아가게 되었다. 학교 주변에 있는 시립도서관들은 동네의 무서운 언니오빠동생들의 아지트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내가 어느 학교 출신인지 알 수 있는 교복을 입고, 누가 봐도 진한 '모범생'의 냄새를 풍기는 내가 가기는 두려웠다. 그래서 학교에서 3-40분은 떨어져 있는 집 근처 도서관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진단명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많이 수줍고 수동적이고, 혼자 무언가를 스스로 하는 것을 일평생 거의 해본 적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자발적 의지를 갖고 계획해 행동으로 실천을 옮긴 것이 도서관 가기가 아닌가 싶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던 시절이니 굳이 PC를 켜서 내가 갈만한 도서관을 검색하고 지도를 대략적으로 외우며 초행길에 제대로 찾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가야했다. 나로서는 굉장한 용기를 낸 행위라고 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이렇게 나는 생존이라는 전투를 치르는 장수의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입장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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