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거의 습관적으로 달라붙는 지겹고도 익숙한 나의 친구, 불안과 우울. 나이를 먹으면서의 좋은 점은 이제 이 까다롭고 쉽게 떠나려고 하지 않는 이 방문객을 조용히 돌려보내는 여러 방법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한 방법은 바로 방울토마토 마리네이드를 만드는 것. 정확히는 조그마한 방울토마토들을 삶고 그 껍질을 벗기는 것에 있다.
얼핏 들으면 쉬워 보이는 이 요리는, 방법은 쉽지만 은근 손이 많이 가서 시간을 내서 만들어야 한다. 방울토마토를 깨끗하게 씻어주고서는 자리를 잡고 앉아 이 친구들의 엉덩이에 십자가 표시들을 하나씩 남겨준다. 그리고는 끓는 물에 데쳐주고 하나씩 섬세한 손길로 껍질을 일일이 벗겨줘야 한다. 그다음은 그저 양념장을 비율에 맞게 따라주고 냉장보관만 하면 되니 이 요리의 핵심은 방울토마토 하나하나의 섬세한 손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꽤나 귀찮은 일이다. 이 하나하나 껍질을 벗겨주는 것이.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토마토는 마리네이드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들어가는 재료가 얼마 없고 딱히 어려워 보이지 않아 유튜브를 보고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 시도를 했다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앉아서 이걸 하나하나 손질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울컥 화까지 날 정도였다. 그러다가 처음 만져본, 껍질이 벗겨진 작고 온화하고 따뜻한 방울토마토의 속살은 내 마음 안으로 스며드는 무언가를 살며시 건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촉감과 부드러움. 뭔가 굉장히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번거롭고 수고롭지만 뭔가 굉장히 귀한 것을 다루고 있는 느낌도 들고 방울토마토의 예상치 못한 보드라운 촉감에 왠지 마음속 때까지 그 껍질과 함께 같이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심심함을 견디기 위해 도전해 본 이 새로운 요리는 나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준 것과 같았다.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껴지는 몇 안 되는 귀한 순간으로 이르는 문을.
우울함이나 좌절감이 나를 덮칠 때는 물성이 있는 것을 결과로 만들어 내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고, 내 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성취를 얻는 것이 좋다. 어떤 식으로도 결과를 만들어 나 자신의 효용성과 가치를 한 번 다시 입증하는 기회도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까지 나에게 위로를 가져다준다면 이 이상 내가 바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껏 차가워진 날씨와 더불어 마음속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다면, 근처 채소가게에서 방울토마토를 사보는 것을 추천한다. 아무 생각 없이, 아니면 잔잔한 재즈음악이나 뉴에이지 피아노곡을 틀어놓고 손으로 하나하나 방울토마토의 껍질을 벗기다 보면 어느새 그래도 조금은 괜찮아진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