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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Han Feb 02. 2022

명상과 짜증,화 사이의 관계

명상을 해도 짜증은 여전히 난다!


들어가며


내가 틈만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광기어린 눈망울로 '명상해..명상하면 모든것이 좋아진다..'라며 

명상에 대한 영업을 시도해서 그런지, 나와 친한 사람들은 명상을 나를 놀리기 위한 요소로 써먹곤 한다.

그 중 대표적으로 짜증나는 것은(!), 내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 때마다

너는 명상을 한다는 사람이 뭘 그렇게 네 마음 하나 못 다스리고 짜증을 잘 내냐?

라며 친구가 놀린다는 것이다.


먼저, 이것이 어떤 모함이나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짜증과 불만이 유독 많은 사람이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나를 '삐돌이'라고 놀린 바 있고, 중학교 시절 선생님은 나를 '투덜이 스머프'라고 불렀으며, 무엇이든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과 하이톤의 목소리가 만난 결과, 나는 철이 든 그 순간 이후로 한번도 조용한 사람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어떻게 불만이 없을 수가 있지?!

여튼, 저 말을 들은 이후로 꽤 오랜 시간동안 명상과 짜증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는데, 그 결과 나는 <명상을 한다 해서 온화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이 얘기는 명상을 하는 사람이면서(1), 동시에 온화하지 않은 사람(2)인 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나 스스로를 위해서 한번쯤 얘기하고 싶었던 주제였다.(그런데 다른 명상 수행자들은 별로 짜증이 나지 않는지, 굳이 이런 주제로는 잘 얘기를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나와 유사한 처지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며) 짜증은 짜증대로 나면서, 명상이 내 길이 아니라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도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명상과 온화함의 정적 상관관계>는 명상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잘못된 통념이며, 오히려 명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프레이밍일 수 있다는 나의 생각을 공유함과 동시에 명상을 포기하지 말라는 얘기도 덧붙이고 싶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명상과 짜증의 관게를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명상이 필요한 사람은 <짜증이 많은 사람>이지 <짜증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명상의 신비화를 정말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이다. 늘 말하지만, 명상은 누구든 시도할 수 있고, 방법만 배우면 그 결과를 맛볼 수 있는 정신활동이다.

명상은 스도쿠, 노노그램처럼 일종의 유희활동이라는 점을 늘 강조하고 싶다

명상은 능력적으로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이유가 없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하지 않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즉, 명상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명상이 스스로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필요할 수는 있는데, 애초에 마음이 편안-하고, 모든 것을 쉽게 흘려보내는 것을 잘하고, 화라는 것을 내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살면서 명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가능성은 높을까 낮을까?


당연하게도 낮을 것이다. 괴롭고 화나는 일이 없는데 괴로운 감정을 조절해야 할 필요성이 생길 리가 없다. 세상에 즐길 것이 얼마나 많고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 바쁜 시간과 에너지를 쪼개서 굳이굳이 명상을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반면, 짜증이 많은 사람이나 화가 많은 사람은 어떨까? 이 사람들은 짜증을 다스리고 화를 다스리는 게 인생의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명상은 종종 권장되고, 또 많은 사람들이 효과를 보면서 당연히 명상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게 된다. 그렇다면 명상을 하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 본다면 대체로 어떤 사람들이 많을까? 당연히 화, 짜증이 많은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다.(통계를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통계적 지식이다.) 이미 화가 많고 짜증이 나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어떻게 해보겠다고 명상이라도 해보려고 앉아있는데, 혀를 끌끌 차며 '저러니 명상이 되겠어?' 라고 훈수질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통계도 모르는 수포자라며 혀를 끌끌 차 줄 것이다.



명상을 하면 화, 짜증의 '처리 능력'이 생기는 것 뿐이다.


위에서 '화, 짜증이 많은 사람들이 명상으로 효과를 본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명상과 짜증 간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효과'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명상이 짜증, 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방식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느냐는 것이다. <명상을 '많이 하면', 짜증/화가 '없어진다'>는 식의 이해는 명상에 대해 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의 멍청한 과단순화에 불과하다.


명상과 짜증의 관계는 명상을 통한 정서조절능력의 개선과 관련된다고 힐 수 있다. 이를 명상의 3요소를 가지고 설명할 때, 명상 상태 2, 일상훈련, 명상 마인드 등을 활용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사족이 될 수 있으니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고, '나에 대한 탐구'라는 키워드와 '마음챙김 명상'이라는 분야와 관련해서 설명해 보겠다.



(1) 나에 대한 탐구  

먼저 '나에 대한 탐구'는 쉽게 말해, <나>와 <나 아닌 것>을 나누는 탐구를 의미한다. '짜증나는 나', 혹은 '화나는 나'는 얼핏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지만 <짜증+ 나는 + 나>, <화+ 나는+ 나> 와 같이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나눠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짜증, 혹은 화라는 감정(1)이 있고, 그것이 발생하는 상황(2)이 있으며, (1)과 (2)와 동시에 있는 나(3)가 있는 것이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나는 나>를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며 세상을 살고 있다. 아쉽지만 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사람들은 화에서 오는 부정적인 영향까지도 나의 일부로 생각하고 분리해내지 못한다(팔이 부러져 아프다고 팔을 잘라내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저 덩어리를 두 덩어리, 혹은 세 덩어리로 분리할 수 있는 인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은 화에서 오는 부정적 영향도 필요에 따라 나와 분리해서 인식할 수 있다. 즉, 나에 대한 탐구가 많이 진행된 사람은 화가 나는 상황에도 화와 나를 분리할 수 있게 된다.

짜증이 안나는 것과, 짜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다르다

<화와 나를 분리한다>는 것은 <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과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애초에 인간은 화를 내지 않게 설계되지 않았다. 심리학에서는 외부 자극에 의한 정서 반응, 그 중에서도 스트레스와 관련된 부정 정서 반응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발달된 정신 반응으로 본다. 진화적으로도 이런 반응이 예민하게 발달하지 못한 개체는 예전에 도태되고, 현재에는 반응에 예민한 개체만 살아남았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정 정서가 애초에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인간 원리를 알려고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떠올릴 법할 발상이다. <명상 활동을 통해 개선될 수 있는 자아 탐구 능력을 통해 나와 내가 아닌 것을 보다 예민하게 구분하는 능력을 개발하면서, 부정 정서를 의식적으로 분리해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명상하면 짜증이 줄어야지!> 보다는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2) 마음챙김 명상

'마음챙김 명상'의 측면에서 명상과 짜증의 관계를 살펴볼 때, 여기서 말하는 명상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알아차림', '순간에 대한 지각' 을 의미한다. 위에서 말한 '화+나는+나' 를 세 덩어리로 나누는 개념을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을 실제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림'의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처음 단계에서는 '화,나는,나'를 알아채는 과정이 의식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알아차림 연습을 해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나는 나'를 다른 덩어리로 인식할 수 있다는 감각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과정이 없는 경우에는 화와 나를 동일시하는 반응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정리하자면, 사건과 감정, 나로 구성된 한 덩어리를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분리하기 전의 시작지점을 '알아차림'이라고 볼 수 있다. 유사한 상황에서 알아차림이 많아질수록, 알아차림은 점차 습관화되고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도 자동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내가 이해하기로 보통 마음챙김 명상에서 얘기하는 알아차림은 <의식적 행위>와 <자동적 발생>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 일컫는 것 같다.혹시 잘못 알고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다!)


마음챙김을 처음 하거나 잘 못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알아차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인지자원을 사용해야 하고, 의식적으로 시도해야 하며, 때에 따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림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화가 날 때, 알아차림 이딴게 뭔 소용이야! 하고 화가 더 난다면 그게 알아차림이 잘 안된 것이라다.) 하지만, 마음챙김을 오래 하거나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인지자원을 상대적으로 적게 쓰며, 의식하지 않고도, 높은 성공률로) 알아차림을 하게 되며 남은 인지자원으로 화, 짜증과 같은 감정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만약 자신이 아직 알아차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아직까지 부정적 감정을 처리할 역량은 부족한 상태라고 인식하는게 뼈아프지만 현실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알아차림이 잘 되어야 그 다음으로 정서 조절이 가능한 것인데, 이 대목에서 마음챙김 명상은 '순간에 대한 지각' 강조한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  순간에 대한 지각이다. 이 역시 정서심리학을 바탕으로 근거를 대며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부정 정서 반응, 특히 스트레스 반응으로 알려진 이 반응은 애초에 짧고 굵은 프로세스를 전제로 한다. 부정 정서가 발생한 그 순간에 내 몸의 템포를 순간적으로 확 올리면서 이벤트에 반응하고 대처한 다음, 이벤트가 끝나면 반응을 위해 끌어온 에너지(신경전달물질이 될수도 있고, 혈류가 될 수도 있다)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 식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제자리 돌려놓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스트레스 레벨이 계속 높게 유지되면, 쓸데없는 긴장과 과민반응 상태가 계속해서 유지되고, 우리의 신체는 이런 비효율적인 과잉 상태를 버티지 못하게 될 것이다.

general adaptation syndrome (Selye, 1936; 1976)

이것이 '순간에 대한 지각'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이런 <비효율적 정서 과잉 상태>를 유지시키는 데 바로 과거, 미래에 대한 지각이 관여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표현으로 많이 설명되는데, 짜증이라는 정서가 발생한 사건이 종료되었는데도, 만약 내 머릿속에서 '왜, 어디서 짜증이 난거람?(짜증의 원인을 분석)' 혹은 '또 이것 때문에 짜증이 나고 있네(과거의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의 정보를 처리)'와 같은 과거, 미래까지 화와 짜증을 확장하여 지각하게 된다면 우리 신체는 스트레스 사건이 끝났음에도 스트레스 반응을 종료하지 않고, 그 상황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며 그 결과 과부하에 걸리고 더 나아가 스트레스 저항력까지 잃게 되는 것이다.

반면, 짜증과 관련된 사건의 그 순간을 중심으로 정서를 조절한다면, 사건의 종료와 동시에 사건이 종료된 것으로 신체가 인식하기 위한 인지적 기반이 만들어져, 더이상 긴장 상태를 유지하지 않게 되고 체내 자원을 효율적으로 가동할 수 있게 된다.



'짜증 처리 능력'은 쉽게 생기진 않는다


'짜증은 진정한 너가 아니다' 라느니, '지금 순간을 알아차려라' 라느니... 대체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에게는 진부한 문장이나 말장난같이 보일 수도 있다. 이걸 몰라서 내가 지금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아니다...개소리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문장이 단순하다고 해서,  문장의 의미를 체득하고 실제로 적용하는 것도 단순한 것이 아니다예를 한가지 들어보겠다. 축구를 잘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공에 대한 감각과 그라운드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 그때그때 전략을 짤 수 있는 머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안정환 선수와 이천수 선수가 자신의 유튜브에 나와서 하는 말이다. 나는 두 선수의 말을 이해할 수는 있고 공감가는 바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내가 실제로 몸으로 행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구기종목에는 젬병이라, 당연히 축구도 정말 못하는 사람이다.


명상도 똑같다. 명상을 '정신활동'이라고 생각해서 머리로만 이해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신활동 역시도 습관화, 훈련, 체득과 같은 행위가 포함되어야 실제로 우리가 삶에서 써먹을 수 있다. 하다 못해 명상을 유희 차원에서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그 유희를 느끼기 위해서 행위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고,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정신활동, 이해 자체도 인간의 행위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알아차림이니 나에 대한 탐구니 아무리 좋은 내용을 책에서 읽고, 브런치에서 읽고, 유튜브에서 아무리 많이 봤다고 하더라도, 그런 원리를 나의 일상에서 적용하려면 내 스스로가 그것을 소화하는 시간이 필수적이다. 실전 상황에서 처음 적용을 해볼 때면 의식적인 노력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그때 그때 응용하는 과정에서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기간이 충분히 지나고 나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정보처리를 일관된 맥락에서 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런 적용이 나의 삶에서 긍정적 결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체험한 후에야 '나는 명상을 일상에 적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글귀 하나 멋들어지게 붙여놓고, 그 글귀를 아침 저녁으로 쳐다만 본다고 그게 일상으로의 적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제 편한 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의미없는 말에 불과하다.

계획을 짠다고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계획을 잘 짜야 훌륭하지..

너가 허접 아니야?


요가하고 명상하는 사람들의 긍정적 에너지, 불상에서 한결같이 볼 수 있는 은은한 미소.. 대부분 사람들은 명상과 관련해 위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원래 명상을 하면 짜증도 화도 사라지는데 그냥 내가 명상 허접(!)이라서 짜증을 계속 내는 것 아닐까? 솔직히 말해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오래 전 배운 성격심리학 수업의 한 학기 수업의 결론을 떠올리고는 나는 자신있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분, 사람의 성품은 바뀌지 않는다. 성격은 타고난 것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이 성격심리학 학계의 정론이다화와 짜증 역시도 인간의 성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도나 반응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타고난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명상을 하며 맞닥뜨리는 그 평온의 순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그 평온을 경험했기에 명상의 영역에 한 켠 자리잡고 앉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명상을 하는 것이 짜증 0%인 삶에서 오는 지속적인 평온을 담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오히려 평온 역시도 순간순간 발생하는 화와 짜증을 잘 처리한 후에 경험할 수 있는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짜증 많고 화가 많아 고민인 사람들께 고한다. 그들의 미소가 위선이라 생각지 말고, 혹은 스스로가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없다고 생각지 말자. 오히려 명상을 대표할 수 있는 얼굴의 모습은, 가득한 고민에 찌푸려진 미간일지도 모른다.



마치며


이 글에서도 (가상으로 가정한)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향한 짜증섞인 논조가 미처 숨겨지지 않은 것 같다. 근데 어쩌겠는가. 그게 나인걸. 명상에 관심이 있어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는 한없이 열려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나의 짜증 아래에는 명상에 대한 열정이 살아 숨쉴 뿐이라는 것을 알아 주길 바라며 오늘 글을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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