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부산으로 떠나다
회사 다니 싫어 도피하듯 떠났던
2009년 그해 추억여행의 시작은
내 삶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나를 찾는 여정이었다.
변하지 않는 공간에서
변해버린 지금의 내 모습을 놓고
꿈 많고, 현실을 알아가던
그 당시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부산"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향"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나에게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곳에 의미가 강했다.
추억여행으로
마음속 깊이 간진한 그립고 정든 곳으로 자리 잡았다.
세월이 지나가면
모든 것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새로운 도시는
내 추억까지 지워버릴 것을 알기에 서글프다.
그것 또한 현실이고 우리 삶이다라는 생각이 스친다.
내 기억과 추억 속 도시 모습이 함께 할 때
내 눈과 머리와 피부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당시 그곳 있던 나를 만나기 위해
나는 2009년 그렇게 부산을 찾아다녔다.
<부전 시장>
내가 알기로 부산에서 제일 큰 재래시장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 따라갔던 시장이다.
엄마는 장을 보러 갈 때면 내 손을 꼭 잡고
집에서 걸어서 약 1시간 분정도 거리의
부전 시장을 1주일에 하루 이틀은 방문하였다.
어린 소년에게 시장은 별천지였다.
당시 나에게 부전시장은
세상의 모든 물건이 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을 이 골목, 저 골목 돌 때마다
어머니는 시장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얘기를 하고
필요 물건을 흥정하고 구매하셨다.
갑자기 필요한 장거리가 생기면 외상으로
장거리가 없으면, 예약을 하시고
다음 장을 보러 나올 때 구매하시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시장이라는 곳은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고객과 상인의 관계가 아닌
서로 필요를 주고받고, 우리였다.
난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튀김과 왕알사탕과 과자등을 먹곤 했다.
가끔은 건어물가게에 진열된 상품
멸치와 포들을 지나가는 길에
몇 개 집어서 먹고 가곤 했다.
건어물 가게 주인은
흘리지 말고 갖고 가라고 한마디 하실 뿐
아이들이 집어 가는 것에 너그러웠다.
부전시장은 해산물들이 저렴하고 다양했다.
시장 골목은 업종별로 구분되어 있어
골목을 돌아 나설 때마다
다양한 먹거리와 입을 거리 볼거리들로 가득 차 있다.
오랜만에 방문한 부전시장은
그 옛날의 정취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파장시간이라 그런지 상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두부김치에 막걸리를 놓고 파장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짙은 부산 사투리에 둘러싸인
나 자신을 발견하고 이곳이 낯설지 않음을 느꼈다.
고향의 정취라는 것이 이런 것일 든 하다.
몇십 년 만에 찾아왔어도 낯설지 않은
그때 그 기억으로 골목골목을 누빌 수 있는 추억들...
강산이 4번은 변했음에도, 변하지 않은 도시와
어머니와 장을 보던 소년이 기억하는 모습의
흔적들이 남아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 보수동 책방 골목 >
1980년대 보수동 책방 골목...
양정 집에서 버스를 타고
약 1시간가량을 가야 하는 곳이었지만,
언제나 신학기가 되면 어김없이
우리 남매는 이곳을 찾았다.
국제시장 맞은편 보수동 헌책방 골목
말이 헌책방 골목이지 새책도 저렴하게 팔기도 한다.
신학기가 되면
참고서와 문제지등을 사러 이곳을 어김없이 왔다.
용돈을 벌기 위한 방법으로
새책 같은 헌책을 구매하기 위해 왔었다.
당시 보수동 헌책방은
1년이 지난 참고서와 문제집을 팔았다.
부모님에게는 새책 값을 받고,
보수동에서 헌책을 구매했었다.
가끔 1년 이상된 헌책 중
깨끗한 책은 가격이 더 저렴하였고
나는 그런 책을 구매하기 위해 발품을 많이 팔았다.
그리고 책 구매 후 남은 돈으로
국제 시장에서 군것질을 하곤 했다.
보수동 책방 골목은
처음에는 누나들과 이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갔었다.
우리는 보수동을 시작으로
국제시장과 자갈치 시장까지 돌아다녔다.
호기심 많았던 청소년 시절
어떤 친구는 옐로하우스 골목을 누비기도 했다.
나는 대학생이 되어
가끔 이곳에 들러 문학책과 역사책을 사곤 했다.
그리고 학창 시절 책들을 이곳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이곳의 헌책 냄새가 나를 끌어당기는 듯하였다.
새책 잉크 냄새와는 다른
헌책냄새는 갓 볶은 커피 향처럼 좋았다.
세월이 흘러 다시 방문한 보수동 책방골목은
그 옛날 다양했던 서적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참고서와 만화책을 중심으로 바뀌었다.
고서적과 문학 인문 과학 서적 등등을 취급하는
서점들은 급격히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 옛날 가끔 이곳에서 데이트 코스로
이곳을 왔다 기억들이 떠오른다.
젊은 시절 내 모습이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2009년 추억 여행을 계기로
가끔 부산 출장을 올 때
시간을 만들어 보수동 책방 골목을 다시 찾았다.
나에게 보수동 책방은
잦은 이사로 잃어버린 책을
다시 찾는 보물창고가 되었다.
아내는 짐이 된다고 싫어하는 데
나에게 잃어버린 책을 다시 구매하는 것은
어릴 적 내 일기장을 다시 읽는 느낌이다.
<부산 지하철>
부산 지하철이 생기고 얼마 되지 않아
지하철 객실 안에 신문판매하는 사람을 상시 모집했다.
지금 용어로 말하면 플랫폼 노동자와 비슷하다.
나는 학교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었다.
발표를 하는 것을 꺼렸고, 앞에 나서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잘하지 못하는 걱정 많은 소년이었다.
나는 나의 이런 성격이 정말 싫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내 성격에 변화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나는 내성적이고 용기가 없는
나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바꾸고자 지하철 신문팔이를 했다.
지하철 신문 판매는
신문 판매 대금의 일부를 판매자가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돈벌이가 되려면 출근시간 지하철을 배정받아야 한다.
지하철 배정 권한은
지하철 신문 판권을 가진 회사의 소장님에게 있었다.
그는 매일 출근하고, 일찍 나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하철 탑승을 배정하였다.
지하철 탑승 배정은
신문 판매 시작 지하철 역을 지정하는 것이다.
신문 판매를 위해 새벽 5시 반까지 범내골 역에 있는
신문 배급소로 가야 한다.
그날 팔 신문을 배당을 받고
우리는 각자 배정받은 역으로 이동을 했다.
지하철 역에서의 치열한 판매전...
"신문 있습니다,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신문 있습니다!"
"신문이요!! 조간신문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배테랑들은 다양한 구호로
지하철의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아침 첫차에서 시작하여 오전 11시에 마치기까지
약 4시간 동안 3만 원에서 5만 원을 벌어간다.
지하철 신문 판매 시작한 첫 일주일
내가 매일 벌은 돈이라곤 5천 원에서 1만 원으로
배테랑과 비교했을 때 너무도 보잘것이 없었다.
나름의 방법을 생각하고 구호도 만들고 그렇게 6개월...
나도 3만 원 수준까지 수익을 끌어올렸다.
당시 아침에는 신문판매를 오후에는 과외를 하며
나름 열심히 살았던 기억이 새롭다.
위의 초록색 지하철 플랫폼은
당시 전철 종점으로 판매원들끼리 모여
자신이 판매하는 신문 더미 위에 앉아서
이야기 나누던 우리들만의 보장된 공간이었다.
우리는 지하철 종점에서 종점까지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다음 배차 순서까지 잠깐 휴식을 취하던 공간이었다.
내가 처음 지하철 신문 판매할 땐
지하철구간도 짧았고 노선도 하나였던
부산 지하철이 이제는 3호선까지 있었다.
부산 추억 여행동안 이동은 가능한 지하철만을 이용하였다.
그때 그 기억 때문에...
지금은 지하철 내 신문판매원이 사라지고 없지만
당시의 기억이 새롭다.
지하철 객실 안에서 신문 판매할 때
초보때는 아는 사람이 있으면 부끄러워서 피했던 나는
몇 개월이 지나면서 친구, 선생님,
예전에 살던 동네 어르신을 만날 때면
강매를 할 때도 있고, 때론 무료로 드리기도,
강매를 통해 수익을 올렸던 기억....
지하철 이곳은 변하지 않겠지라는 생각
그리고
나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조금은 무모한 도전을 했던
그 시절의 나에게 칭찬을 하며,
나는 부산 지하철 역사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