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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원 Oct 05. 2024

슬픔만 가득했던 시절

1980년대 부산으로 떠나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공부의 필요성을 조금 느꼈던 나에게

동에서 운영하는 동네 공부방은 최적의 장소였다.

동네의 중고등학생 모여 공부하는 곳이었다.

나는 이 공부방에서

사춘기를 함께 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친구들보다 공부방에서 만난

선배와 친구들과의 인연은

나의 사춘기를 꽉 채웠다.


그리고 이 시기는 나에게 청소년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좌절을 모두 느꼈던 시기였다.


1983년 아버지가 정년퇴직 이후

급속히 가세가 기울었다.

4남매를 키워야 했던 부모님은

집을 줄이며 이사를 했다.  

그 당시 누나들은 고등학생이고

난 중학생 동생은 초등학생이었으니까...

돈 들어갈 일이 많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맞벌이를 했지만

퇴직 후 새롭게 취직한 아버지의 직장 벌이는

이전 직장만큼은 안 되는 듯 양정 4동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작은 집을 구해

다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사 온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구멍가게를 인수하셔 운영을 하셨다.

이 시기 난 공부방 친구들과의

본격적인 우정을 쌓아갔다.

청포도집 동네 아이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양정 4동 두번째 이사온 동네 골목


큰 골목을 들어와

다시 작은 골목 왼쪽 첫 번째 집이 이사 온 집이다.

여기도 어김없이 세 들어 사는 분들이 계셨고,

집이 작아 1 가구만 있었다.

골목 왼쪽이 살던 집


이곳에서 공부방은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처음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다니다가

또래 친구들과의 자연스러운 만남과

그 속에 이성친구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공부보다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그러면서 공부에 대한 열등감과 삶에 대한 번뇌로

그렇게 아름답지만 힘든 나날을 보냈다.


집의 가세는 점점 더 기울어 가고 있었기에

보이지 않는 집안의 근심도 커져만 갔다.

주변 상황을 느끼기 시작한 사춘기는

나와 다른 친구들과 상대적 비교했고

자신이 초라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친구들과의 만남도 제한했었다.


사춘기의 심리적, 정신적, 심적 힘듦이 있었지만

부모님이나 내 환경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러한 것들이 나의 운명이고

내가 치러야 할 과정으로 당시에 난 생각했다

2009년 당시 대문이 살던 때와 같은 모습


골목 안 우리 집 대문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2009년에 갔을 때

앞집은 리모델링으로 한창 공사 중이었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구멍가게는 신통치 않았고,

부모님은 더 작은 식당을 인수 후 운영을 하다가

모든 것을 접고 또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렇게 이사를 한 곳이

당시 부산에서는 변두리 동네 구서동이었다.
 
구서동은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는

학교와 양정이 가까워 자주 갔었다.

공부라기보다는 순전히 친구들 때문에 공부방에 갔다.


친구들도 공부에 몰입하고, 나도 자율학습 후

학교와 구서동, 양정을 오가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만남도 멀어졌다.


하지만 청소년기를 함께 했던 그 친구들은

내 청춘시절 위안이 되어준

소설 데미안 책과 같은 존재였다.


집이 더 어려워지면서

작은 누나는 여상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고

구서동은 우리 가족에게 암울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계속 맞벌이를 하셨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일을 하시다가

교통사고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셨는 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기준 10년이 지난 1주일 후

아버지도 한 많은 생을 마감하시고

어머니 곁으로 가셨다.


양산 천주교 공원묘지

양정 4동 골목길을 따라 걷는 동안

주마등선처럼 스치는 그때 그 시절의 아픔에

나도 모르게 울적해졌다.

용기가 나지 않아, 아니 가고 싶지 않아서

구서동은 가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가이 돌아가신 후

부산을 벗어나려 했고 기회가 되어

도망치듯 부산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

부산을 떠난 이후 가장 부산에 오래 머물렀다.


어머니를 갑자기 잃었을 때는 존재의 부재로 슬펐다.

"엄마"라는 단어를 잃어버린 상실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한 없는 죄스러움으로 통곡했다.


어릴 적 나의 부모님은 믿음으로 나를 지켜봐 주셨다.

하지만 그 지켜보는 것이 나는 참으로 힘겨웠다.

어린 나를 이끌어 주시지 않았기에...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실망시켜드리지 않는 것을 생각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만 했다.


나의 20대는

또 혼자 방황하는 처절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


슬픈 기억을 벗어나려 동네를 빨리 빠져나왔다

마치 신기루 같은 추억의 장미 빛을 찾으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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