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은 무한의 장에서 발휘되기보다 어쩌면 익숙한 소재에서 발견되고 확장된다. 순수하고 무한한 공간을 찾아 방황하다 어느 순간 가장 가깝고 친숙한 대상이나 장소에서 멈춰 섰을 때 무언가 깨닫고 느끼는 경우(了知)가 있다. 매일 마주하는 밥상에서, 그리운 고향의 풍경에서, 오래된 남도의 자연에서, 활기와 우울이 공존하는 항구에서 감성의 미학은 여전히 발견된다.
전남 신안군 저녁노을미술관(관장 박미정)에서 2025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기념전이 열리고 있다. 오는 10월 19일까지 열리는 이번 기념전은 남도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수묵 실험을 이어 온 박수경(행복밥상), 조용백(수묵서정), 조풍류(남도풍경), 최순녕(신안 바다) 작가 4인이 선보이는 전시다.
행복밥상-민어회_98×131.5cm_한지에 먹과분채_2024
행복밥상-넙치 한 상_122.5x87cm, 한지에 먹과 분채_2025
박수경 작가는 우리 주변의 일상과 전통 미감을 따뜻한 시선과 정서로 재구성한다. 박수경의 <행복밥상 시리즈>는 남도의 밥상에서 행복의 감성을 엮어 짜내는 작업이다. 매일 마주하는 식탁은 평범하면서도 숭고한 공간이다. ‘행복밥상’은 독자들의 눈과 머리를 잠시 쉬도록 한다. 아주 익숙한 소재로 정신을 되살려 맑고 경쾌함을 선사한다. 작가에게 밥상은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이고, 아버지의 희생이며, 친구의 최대 호의“다. 정성은 따뜻하고, 희생은 강렬하며, 호의는 아름답다.
자은도 구영마을, 한지 호분 분채 석채, 86x104cm, 2025, 조풍류
조풍류_자은도 고장마을_한지 먹 호분 분채 석채_91x117cm_2024
"인간은 두 개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스스로 생겨난 자연이라는 무대, 다른 하나는 인간이 만들고 건설해 놓은 문명이라는 무대다" 조풍류 작가는 자연과 문명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인간과 그 배경을 개성 넘치는 색감과 표현을 통해 <남도산수풍경 시리즈>로 기록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자은도에 머물러 온 작가가 수 년간 관찰하면서 자은도 고유의 색과 풍경을 만들어 낸 작품이 <자은도 고장마을>과 <구영마을>이다.
하나의 공간에는 하나의 색(色)이 존재한다. 공간이 색을 결정한다. 공간이라는 맥락 속에서 색은 독립적이고 독자적이다. 하나의 대상에 대응하는 독자적인 색을 찾아 드러내는 것이 화가의 일이다. <자은도 고장마을>에서 하늘과 담수(淡水)는 맞닿아 서로의 색을 교감(交感)하고, 밭 가는 이가 서 있는 대지와 주변 산천은 농담(濃淡)을 달리하며 변주된다. 화가의 상상은 공간의 발견과 색의 교감으로 완성된다.
최순녕 작가는 불현듯 떠오르는 고향과 섬에 대한 잔상을 자연과 음악의 형상으로 엮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움의 감성과 뚜렷하지 않은 목적지로 향하는 ’마노‘(mano, 마음의 알음알이)의 심경을 바다와 음악의 형상으로 전환한다. 캔버스에 남겨진 차디찬 한수(寒水)와 ’슈베르트의 송어‘의 대비는 차가운 마노 의식과 따뜻한 그리움의 향수가 어울어지게 한다.
수묵서정, 한지 수묵 실크스크린 혼합재료, 230x90cm(3점 set), 2025
수묵서정-관계
항구는 거칠면서도 활기차다. 만선의 기대감과 거친 자연의 우울이 유보(留保)된 공간이다. 조용백 작가는 정신의 이념이 아니라 ’정서적 산물로서 수묵‘을 탐구한다. 자연과 일상이 만나는 공간에서, 활기와 우울이 겹치는 지점을 찾아 수묵의 번짐과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조용백이 만드는 <수묵서정>은 전통과 현대가 맞물리는 공간,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공간에서 가장 극적으로 수묵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예술은 유한을 감내하며 무한을 상상하는 일이다. 일상의 공간에서 감성을 지켜내고, 자연 속 문명에서 삶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은 예술의 오래된 책무이다. 행복한 밥상을 지키는 일, 오래된 고향을 경작하는 마음, 바다의 음율을 상상하는 시간, 항구의 희노애락을 남기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예술의 의무로 여전히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