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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평온하게, 채움은 버림으로부터

미술단체 '선과색' 정기전 갤러리이즈 8월20일부터 25일까지

미술단체 '선과색'의 제52회 정기전이 서울 인사동 갤러리이즈에서 오는 8월 20일(수)부터 25일(월)까지 열린다. 1982년 창립한 '선과색'은 강종열, 신제남, 신철, 김해성, 류지수 등 중견 작가를 비롯해 위성웅, 이존립, 전성호, 이상원, 이율배, 정창균, 조근호 등 각기 개성적인 작업을 이어온 젊은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다.


이번 '선과색' 정기전에서 작가들이 펼쳐놓은 주제의식과 작품들은 다층적이고 개성적이면서도 자기성찰과 이상향, 존재와 비움, 형상과 본질 같은 핵심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05 정창균.png 명경지수, 91.0x60.6cm, Oil on canvas, 2024 ⓒ 정창균
06 박경귀.png 사비성에 떠오른 만월, 문양 천 위에 분채, 80X80cm. 2021 ⓒ 박경귀


정창균과 박경귀는 동양적 사유에 바탕을 둔 사물인식과 자기성찰을 캔버스에 담았다. 정창균이 작업하고 있는 <명경지수(明鏡止水)>는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란 의미로, 흔들림 없이 고요한 인간 마음의 상태를 은유한 표현이다. 허심 없이 이치를 깨닫기를 바라는 작가의 지향을 읽을 수 있다. 기록은 그 자체로 고요한 자기성찰이고, 역사는 흔들림 없는 자기의식의 반영이다.


전통 불화 기법을 통해 작업해 온 박경귀의 <사비성에 떠오른 만월>은 만월(滿月), 즉 무한히 많은 각의 집합이면서 각이 없는 형태인 원(圓)을 통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 다다르고자 하는 수행(사마타, Samatha)을 보여준다.


07 박제경.png U-Topos24019, 91×72.7cm, acrylic and gutta on canvas, 2024 ⓒ 박제경
08 엘리유.png Arcadia, 52.5 x 91cm, Acrylic on canvas ⓒ 엘리 유

유토피아를 사유하는 박제경, 엘리 유의 각기 다른 관점과 작업은 깊이 들여다 볼 만 하다. 토포스(topos)는 고정되고 불변하는 땅이자 장소, 논리적인 영역이자 영토를 의미한다. 우주와 같이 무한하면서 한정적인 캔버스 안에서 펼쳐지는 실타래 형상의 선을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유토포스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엘리 유는 그가 상정한 아르카디아(Arcadia, 이상향)를 익숙한 듯 새로운 동양화 한 폭과 같이 새롭게 변주, 재창조하여 독자를 불러세운다. 작가는 신화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다다를 수 없는 낙원이기보다는 익숙한 자연의 형태를 구현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두 작가가 시각화한 미적 공간에 참여하다보면 어느 새 상상과 현실, 우주와 자유, 신화와 자연은 맞닿아 있음을 이내 느끼게 된다.


09 조근호.png 뭉치산수. Oil on canvas. 60.6x72.7cm. 2024 ⓒ 조근호
10 배현철.png 국도7번25429 ,2025년, 72.7x53cm , oil on canvas ⓒ 배현철


조근호, 배현철 두 작가는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을 충실히 마주하면서 익숙한 듯 새롭게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조근호의 '뭉치산수'의 모태인 무등산은 개방적이면서도 압도적인 무게감으로 존재하는 광주의 상징이다. 조근호는 '등급과 차별 없는' 무등(無等)의 존재를 가벼운 듯 무겁게, 따뜻한 듯 차갑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연 혹은 비자연의 구상으로 선보이고 있다.


배현철은 부산에서 고성을 잇는 7번 국도의 어느 한 경유지를 포착한다. 작가는 흘러가는 시간과 고정된 공간의 어떤 역사를 유동과 부동의 경계를 드나들며 안정적인 미감으로 풀어놓는다. 7번 국도를 경유한 그의 미의식이 고성을 넘어 함경도로 이어지는 평화의 길로 이어지길 상상해본다.


11 문칠암.png An empty chair-2504, 72.7×72.7cm, oil on canvas, 2025 ⓒ 문칠암
12 류지수.png A blue box 25-80-30 ⓒ 류지수


비존재를 말하는 순간 존재는 드러나고, 비움을 의식하는 지점에서 채움의 운동이 일어난다. 문칠암의 작품 에서는 생략된 구성 안에서 오히려 두드러진 질감과 형상을 느끼도록 한다. 비워진 의자는 존재의 비워짐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자체로 비존재인가. 물음은 계속된다.


류지수의 작품 <A blue box>는 비움을 수행하기 위한 세계인 '블루 박스'를 통해 인간의 허욕, 허심에서 벗어나길 제안한다. 형상은 언제나 채워져 있으면서 비워져 있다. 비워진 것은 색으로 경계지워진 욕망이고, 채워진 것은 선으로 이어진 희망이다.


자연과 인위, 정원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행복의 선율을 노래하는 이존립, 김해성, 이상원 작가와 따뜻한 색과 선으로 위로를 건네는 위성웅, 김진희, 이승현 작가의 작품 역시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14 이존립.png Happy day, 60.6x50.0cm, Oil on canvas, 2024 ⓒ 이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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