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옥 주연의 영화 <완령옥>(阮玲玉, Center Stage, 1991)을 다시 봤다. 1930년대 중국영화 최고 스타였던 완령옥의 짧은 생애를 다룬 영화로 처음 봤을 때보다 이것저것 보이는 게 더 많았다.
나는 완령옥을 김염에 관한 논문을 쓰다 알게 되었다. 알음알음 알려졌듯이 김염(본명 김덕린, 중국어 진옌, 金焰)은 일제시대 중국에 건너가 중국영화 최대스타가 되었던 조선인이었는데, 자연스레 1930년대 인기 영화에서 완령옥과 남녀주연을 맡곤 했다. 김염의 생애를 따라가면 조선 독립운동과 근대 동아시아 디아스포라의 일면, 그리고 상하이가 지닌 문화사적 의미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주어진다.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金弼淳) 지사는 국가보훈처가 ‘2023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인물이다. 함께 선정된 이가 무려 안창남과 송몽규 선생이다. 김필순은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모교의 교수로 후진양성에 앞장선 동시에 신민회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인물이다. 일제가 조작한 데라우치총독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자 검거를 피해 1911년 만주로 망명했으며, 1919년 치치하얼에서 의문의 병사를 했다.
중국에서 고아가 되다시피한 김염은 고모부인 김규식(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의 상하이 집을 비롯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 자수성가해, 당시 중국의 할리우드였던 상하이에서 최고 인기스타가 되었다.
김염은 완령옥 영화에 잠깐 나온다. <세 모던 여성>(三個摩登女性, Three Modern Women, 1933)의 주연배우인 완령옥과 김염이 감독의 연기지도를 받는 장면에서다. 완령옥이 실존 배우의 일대기를 다루는 영화다 보니 1930년대 중국영화를 이끌었던 감독과 제작자들이 실명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중 쑨위(Sun Yu, 孫瑜)는 일찍 미국에 유학해 위스콘신대학과 뉴욕대학에서 연극과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후 1930년대 중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명감독으로, 바로 무명의 배우 지망생 김염을 주연배우로 발탁한 인물이었다. 또 1991년 영화다 보니 엽동, 유가령, 양가휘 등 현대 홍콩영화사에 족적을 남긴 배우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완령옥은 자그마한 몸매에 귀여운 듯 섹시한 여성이었다. 장만옥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련의 주인공’ 완령옥의 우수와 고적미를 우아하게 표현했다. 극에 등장하는 볼룸(ball room) 씬은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마다의 클리셰지만 볼 때마다 즐겁다. ‘동양의 파리’라 불렸던 만큼 상하이 조계지는 유럽의 파티문화를 그대로 이식받아, 도쿄와 함께 당대 아시아 최고의 음악문화, 유흥문화를 꽃피웠던 곳이었다. 만옥과 유가령이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사랑스러워 아직도 눈에 밟힌다.
완령옥을 쓰러뜨린 것은 스캔들에 기생하고 가십을 부추기는 언론권력이었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의 말은 정말 무섭다”는 완령옥의 유서는 고 이선균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무거웠다.
사족 1. 나는 원래부터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보다는 살짝 키치스런 것을 좋아한다. 일부러 허름한 식당을 찾을 때가 있다. 보석이 되기 전 원석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고 싶은 마음 비슷한 거라 할까(^^). 장만옥은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주연급 배우라기보단 드라마로 치면 덜 성숙한 ‘처제’(^^) 역할 같은 느낌의 배우였다. 그러다 사라지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장만옥이 주연배우로 성장했을 때 묘하게 기뻤던 기억이 난다.
사족 2.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 20세기 초 중국영화는 중일전쟁과 2차대전을 거치며, 홍콩으로 그리고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로 확장해 나갔다. HSBC(홍콩상하이은행)은행이 홍콩-상하이 커넥션을 표방하듯이, 쇼브라더스(Shaw Bros.)는 상하이에서 시작해 홍콩과 싱가포르로 확장한 초국적 영화사다. 한류도 그 초기, 화교 네트워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졸저 『한류가 뭐길래』, https://acr.comm.or.kr/_common/do.php?a=full&b=43&bidx=2499&aidx=2832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