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더스의 우승을 기원하며
“인천야구”라는 단어에는 쓸쓸한 항구에서 느껴질 법한 파토스가 배어있다.
20세기 초반부터 야구열기가 높았던 도시로서, 한국 최초의 아시아 홈런왕 박현식, 국가대표 부동의 유격수 김진영을 배출한 곳. 1953년부터 59년까지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 인천고와 동산고 둘 중 한 팀은 꼭 올랐을 정도로, 당시 명실상부한 야도였다. 1970년대 고교야구의 중심이 대구경붉, 광주군산으로 옮겨갈 때부터 인천야구는 기나긴 침체기에 들었고,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된 다음부터는 “꼴찌팀”이라는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고백하건대 82년에 내 별명은 “삼미”였고, “감독”이었다. 어른들과 초딩들은 몰라도, 감수성 강하고 또 대입에 내몰린 인천 고딩들은 의도적으로 삼미를 멀리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들.. 그런데도 난 꿋꿋이 삼미를 응원해 같은 반 친구들은 “두보가 삼미 감독을 맡아야 하는데..”라며 나를 그렇게 불렀다. (당시 삼미 팬들의 신산함과 고통은 박민규의 명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잘 드러나 있다... 외람되이 일독을 권한다.)
오늘 서울 연고의 키움과 인천 연고의 SSG 랜더스가 한국시리즈 1차전 경기를 한다. 키움은 따지고 보면 2000년 1월, 인천에서 서울로 연고 이전 선언을 한 현대 유니콘스와 연결된다. 바로 그 사건으로 인해, 당시 인천야구 팬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이에 대해선 나무위키에 잘 정리된 항목이 있다.
(https://namu.wiki/.../%EC%97%B0%EA%B3%A0%EC%9D%B4%EC%A0%84)
오래전 일이지만 여전히 씁쓸한 사건이다. 2000년 당시 현대 유니콘스 선수들도 연고지 이전 결정에 충격을 받고 동요했다고 한다. 팀의 주장이었고 “인천야구의 심장” 소리를 듣던 김경기는 결국 프런트에 요청해 새 인천 연고 구단 SK와이번스로 팀을 옮긴 바 있다.
그대, 사랑하던 연인에게 버림받아본 적 있는가. 떠나버린 항구의 차가운 파도 소리. 그 쓸쓸하던 시절, “인천SK”를 외치며 인천야구 팬들의 상처를 어루만졌던 팀이 있었고, 그 역사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은 팀이 랜더스다.
랜더스의 우승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