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소년이 가버렸다. 풀을 치다가 그 아이가 안보여서 어디 숨어 쉬나 했더니, 그새 택시를 불러 떠났다고 한다. 한여름, 도량 주차장에 자갈돌을 나르며 밤마다 코피를 쏟던 열일곱 살 출가자는 일주일을 채 못 버텼다. 밭일을 마저 마치고 연장에 묻은 흙을 씻으려 간 수돗가엔, 물 호스가 뱀 또아리 틀 듯 탄탄하게 말려 있다. 어른처럼 해 놓을 엄두가 안 나, 풀어 쓰지 못했다.
뜨고 지는 해처럼 어김없는 구도자의 일상 안에서도, 불안이란 그림자는 따라 붙었다. 하루 일이 끝나면 지쳐 떨어져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 없이, 내일을 위해 바로 자야하는 나날. 안 그래도 늦은 출가에, 이러다가 남보다 뒤쳐질까 조급했다.
만덕산에서 좌산 종사님 곁으로 오면서, 어른께서 따로 챙겨 지도해주시고, 경전 연마할 시간도 넉넉히 가지리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뜻대로 되지 않고, 몸이 지쳐갈수록 끊임없이 일만 시키는 어른에 대한 화가 치밀었다. ‘자기만 공부 다 마쳤으면 그만인가? 나에게도 공부할 시간을 줘야지! 왜 머슴처럼 부리기만 하나!’ 속으로 삭히며 누르고 누르다가, 그래도 한번은 짚어야겠다 싶어, 저녁 안마시간에 용기를 내 따지듯 여쭈었다.
“도대체 저는 언제 공부하나요?”
부드러우면서도 엄한 어른의 말씀을,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일심一心으로 하지 못하더라. 방청소 하고 난 뒤 보면 늘 먼지가 남아있었고, 문을 열고선 닫는 일을 자주 잊어버리더구나. 풀을 뽑았다며 지나간 자리에도 어김없이 잡초가 그대로였다. 이건 네가 잡념에 끌려 다녔단 거다.
이렇게 매사에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능력이 부족한 니가, 경전을 많이 읽고 선禪을 오래 해서 어떤 힘을 얻었다고 하자. 넌 그 힘을 네 욕망에 끌려 사용해, 세상을 속이고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기 쉽다.
일상생활에서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능력이 없는 수행자가, 편벽된 수행으로 힘을 얻게 되면, 그건 어린아이가 칼을 쥐고 노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이다. 그러니 넌 마주하는 그 일 그 일에 일심을 들이대서 삼대력三大力을 고르게 키워나가라.”
성성한 기운에 압도된 나머지 머릿속이 하얘져 경황없이 물러섰다. 이후 며칠을, 내 안의 무엇이 불안과 성냄을 있게 했는지 골똘히 궁리했다.
경전공부란 미명아래 숨은 지적욕망,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탐심貪心. 하찮은 일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다고 여겨질 때 치밀던 분노와 거기에 감춰진 오만, 진심瞋心. 경전은 단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할진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글에서 구하지 못해 불안해하던 어리석음癡心. 탐·진·치, 이게 다 매사에 일심을 어그러뜨리는 잡념이요 내 안의 도적이다.
어른의 그림자만 흉내 내다 지쳐 그 자비를 마음으로 받아내지 못했기에, 그 일 그 일을 공부 거리로 공부 기회로 삼지 못하고, 내 한 걸음 한 걸음은 경전이 될 수 없었다.
때맞은 스승의 경책에서 비롯한 성찰로, 제자는 중생의 꺼풀을 놓아 마음을 연다.
봄바람은 사私가 없이 평등하게 불어 주지마는 산 나무라야 그 기운을 받아 자라고, 성현들은 사가 없이 평등하게 법을 설하여 주지마는 신信 있는 사람이라야 그 법을 오롯이 받아 갈 수 있나니라. - 원불교 대종경 10:11
*삼대력三大力 : 부처의 인격에 이르도록 하는 길을 조화롭게 수행해가면 수양력ㆍ연구력ㆍ취사력의 삼대력을 얻게 된다.
*취사取捨 :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