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몇 살이나 되겠느냐?
“이게 끝이야?” “응” 오르막이 다였던 학교에 들른 형기는, 종로타워까지 내다보이는 언덕바지에서 가쁜 숨을 고른다. 무용과 아이들은 종아리가 굵어진다고 종종 택시로 등교하곤 했다.
옹기종기 아담한 캠퍼스라 잰걸음으로 강의실을 금세 옮겨 다니기 좋았지만, 때론 꽃잎 흩날리는 판판한 교정에서 자전거 페달을 굴려 요리조리 쏘다니는 한가한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7년 뒤, 원불교학과 3학년으로 다시 대학에 돌아왔다. 비탈 없이 너른 땅에 호수며 벚나무가 흐드러진다. 콧바람 흥얼거리며, 아주버님 늦깎이 편입 축하로 제수씨가 사준 가방을 둘러매고 쭐레쭐레 교정을 걸었다.
강의동에 들어서니 몇몇이 눈치보다 공손히 인사 한다. ‘나에게!?...어...왜?!’ 어리둥절하며 교실에 들어가 테이블 한켠에 앉아, 맞은편 긴 생머리 단아한 소녀에게 말붙인다.
“저...몇 살이세요?”
“92년생이요. 선생님은요?”
“네?!”
오빠까진 아니더라도 아저씨도 아니고, 선생님이라니...수업 마치고 나와 로비 오른편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서른 중반 적당히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에 예비성직자 슈트suit. 강의하러 온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겠다. 그러고 보니 아재도 이런 아재가 없구나. 88올림픽 때 태어난 아이들이 졸업반이었다. 싱거운 웃음으로 건물에서 나오는 길, 총학생회에서 줄줄이 나눠주는 전단지도 나만 비켜갔다. 내밀었던 손이 멋쩍었다.
기숙사에 돌아와 몸을 씻는다. 미지근히 데워진 물줄기는 몸을 감아 흐르며, 때를 걷은 거품을 아래로 밀어낸다. 몸에 맺힌 물방울을 수건으로 훑어 내리다, 하얗게 내민 체모體毛 한 올을 본다.
‘나도 이제 나이 들어가는 구나...’ 갈색 눈동자, 고르지 않은 이, 마르고 추위 타는 체질. 아버지에게서 내 몸으로 타고 내린 특성도 해가 갈수록 도드라진다. 세월의 흔적은 마음에도 남아, 겪어가며 배워가며 몸과 말과 생각이 지어낸 조막손만 한 ‘나’의 우물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더라. 몸과 마음에 새겨진 시간은 삶의 이력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남대문에서 보석감정 공부하던 시절, 배상덕 박사님께서는 오팔opal을 들어 ‘삶’의 보석이라 아끼셨다. 그 안에 물을 머금은 오팔이, 오랠수록 영롱한 빛을 잃어가며 주인과 더불어 늙어가기 때문이란다. 이제 나는 이 몸도 오팔과 다름없음을, 늙다리라는 서러움도 마음의 장난임을 안다.
눈을 뜨고 감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우리는 모두 한 살이다. 하늘을 닮은 마음은 늙지 않는다.
“하늘이 몇 살이나 되겠느냐?”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나이가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해 보라.”
“한 살입니다.”
“맞았다.”
“그러면 우리는 몇 살인가?”
“한 살입니다.”
“그러면 하늘하고 한 형제이구나. 천지의 나이도 한 살이고 우리의 나이도 한 살이고 만물 동포의 나이도 한 살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 일가一家이다. 이것을 알아야 철든 사람이다. 아까 누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했는데 맞기는 맞으나 반절 맞았다. 오십 점이다. 또 말해 봐라.”
“유시유종有始有終입니다.”
“맞았다.”
“언제부터 유시有始이고 유종有終인가 하면
한 생각 일어날 때 비롯이고 한 생각 마칠 때 유종有終이다.
이것 알아서 일원종자一圓種子로 개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깨치신 불생불멸不生不滅 그 자리가 무시무종의 자리다. 또 인과보응因果報應이 유시유종이다. 이 둘은 알아야 된다.”
- 원불교 대산3집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