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그저 잊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길가다 모르는 척 해도 섭섭할 게 없는 그런 사이. 이따금 싱거운 메시지로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러기를 십여 년. 방송작가로 출가수행자로, 처음 알던 그때와 지금이 영 다를 만큼, 지난 시간이 가볍지 않다. 호기심은 ‘우리 언제 한번 보자’는 예년의 미덥잖던 인사치레를 만남으로 이어줬다.
약속시간이 지나기 무섭게 시계를 만지작거린다. 기다리다 못해 길모퉁이에 나와 두리번거렸다. 멀리, 바다를 닮은 코발트 빛 차림의 S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내 같은 걸음걸이가 여전하다.
두 손 모아 허리 숙여 인사한다. 수행자로 돌아온 옛 선배의 합장 반배가 낯설었던지, 잠시 어찌 할지 모를 표정으로 바라본다. 어차피 치러야 할 어색함이었다. 창덕궁 돌담길을 나란히 걸어 비원祕苑을 곁에 둔 고즈넉한 도량 원불교 은덕문화원에 다다라, 그 이웃 ‘싸롱마고’에 들어섰다. “미인이시네요.”라는 주인장에게 그녀는 멋쩍게 웃음 짓는다.
찻잔을 두고 묵은 이야기를 푼다. 기억에 흐릿하게 남겨진 옛 친구들 소식. 서로를 스쳐간 사람, 사랑 그리고 상처. S의 방송국살이와 나의 출가이야기... 나지막이 번지는 담소는 둘을 가르던 경계를 헐어낸다. 스물하나 스물넷에 첫 인연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다, 삼십 줄에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본다. 대화 내내 줄곧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면 S의 퀭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시든 눈에 비친 무언가를 보고 말았다.
“네 안에 누군가 같이 있어.” “네?!”
차가운 적막이 엄습했다. “무서워요...” 파르르 떨며 적잖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겁에 질린 S를 달래보려 몇 마디 말을 보탰지만, 이미 몸을 일으켜 도망치듯 나가,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쫓아갈 수 없었다.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다.
이전에도 누군가의 눈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느낀 일이 더러 있었고, 때론 자랑삼아 떠벌리기도 했다. 수행 과정에 일어나는 신기한 자취이기도 하기에, 도반들은 재밋거리로 듣고 그러려니 흘려버릴 수 있었겠지만, 문외한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죄책감에 수일을 시달리다, 좌산 종사님을 뵈러 익산에 내려갔다. 어른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으나 들으시곤 침묵하셨다.
공양을 마치고 산책에 나섰다. 늘 그랬듯 낫과 집게, 자루를 챙겨, 잡목을 치고 길가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한적한 공터에 도착했을 때 무심코 여쭈었다.
“지금껏 신통력을 부리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할 줄 아는데도 안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못해서 못하시는 건가요?”
“사심 없이 몸과 마음을 사용하다 보면, 절로 되어지는 도리가 있느니라.”
담담하게 말씀하시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신다. 주민들과 미륵산을 오르내리던 등반객들이 버린 쓰레기로 지저분하던 구룡마을이 좌산 종사님이 계신 여러 해 사이에 몰라보게 깨끗해졌다. 향을 싼 종이에서 향내 나듯, 어른을 닮아가는 마을 사람들과 등산객들. 중생의 허물이 걷힌 자리에 부처의 마음이 드러난다.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신통은 말변末邊의 일이라" 하였고, "도덕의 근거가 없이 나타나는 신통은 다못 일종의 마술魔術이라"고 하였나니라. 그러나 사람이 정도正道를 잘 수행하여 욕심이 담박하고 행실이 깨끗하면 자성의 광명을 따라 혹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자취가 나타나는 수도 있으나 이것은 구하지 아니하되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라, 어찌 삿된 생각을 가진 중생의 견지로 이를 추측할 수 있으리요.- 원불교 대종경 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