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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Dec 28. 2022

해바라기 단상

해바라기 단상


 전북 진안 만덕산에서 막 간사(행자) 생활을 하던 즈음, 해바라기를 피우고자 하는 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그 한 생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저는 아직 깜깜히 잘 모르겠습니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께서 제자들과 첫 선禪을 난 초선지 기도터에 이르는 길에 노란 해바라기를 피우면, 길을 따라 오르는 순례객들에게 또 하나의 기쁨이 될 거라 믿었습니다. 


 제 얘기를 듣고서 오성 교무님은 길 가다 잘 익은 해바라기 한 송이를 얻어 씨앗 삼으라며 주시기도 했습니다. 만덕산 따사로운 가을볕에 돗자리를 펼쳐놓고 씨를 말리며, 마음 속 가득 해바라기 만발한 만덕산을 떠올리는 건, 고된 생활에 제 작은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소망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해 겨울 근무지를 옮기게 되고 이후 바쁜 일상에 치이다 보니 해바라기의 꿈은 차일피일 마음에서 멀어졌습니다. 아마도 그때 제가 마련해 둔 씨앗은 화로에 잘 구워져 만덕산을 찾은 선객들의 간식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필라델피아에서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준비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낼 때였습니다. 은사恩師이신 좌산左山 종사님께서 미국에 들르신다는 소식을 알게 된 저는 어른이 오시는 길에 해바라기를 심어 피우자는 마음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면 그 열매를 이웃인 새와 다람쥐에게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화원에 들러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을 딴 씨앗 한 봉지도 골랐지요. 


 쓰다 버려진 종이컵을 모아 씨 하나하나를 심고 햇볕을 따라 컵을 옮기고 아침저녁으로 물주기를 일과로 삼던 어느 날, 흙 사이로 도드라진 새싹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길을 따라 나란히 모종을 심고 정성을 기울였더니, 다 자라면 어른 키를 넘어선다는 해바라기는 쑥쑥 싱싱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올랐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잎과 줄기가 몽땅 잘려나가 너덜너덜해진 해바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전 근처 숲에 살며 가끔 마주치던 사슴무리를 의심하여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릅니다. 넋 놓은 채로 며칠을 그대로 둬 보았습니다. 


질긴 생명은 앙상한 줄기에 새 순을 밀어 올리더군요. 그러나 새 잎이 나는 종종 그 다음날이면 잎은 다시 잘려나갔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에서는 본적 없는 ‘그라운드 호그’라는 녀석이 그다지도 해바라기 잎을 좋아해, 아예 근처에 굴을 파고 살며 시시때때로 잎을 따먹는 것이었습니다. 


 하교 길 언덕바지에서 해바라기 잎을 따먹던 그 놈과 딱 마주쳤는데, 통통하게 살이 올라 뒤뚱거리며 내빼는 놈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끊임없이 살점을 뜯기며 길가의 흉물이 되어가는 해바라기들을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어, 심었던 그 손으로 뿌리를 뽑아 제 눈에서 흔적을 지웠습니다. 애써 태연한척 했으나 원망과 아쉬움을 끝내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저는 뉴욕에 있습니다. 해바라기 씨를 사다 싹을 틔워 마당 있는 교도님들께 나눠드리고, 나머지는 교당 뜰 양지바른 곳에 심었습니다. 교당에 머물다 떠나가는 분에게 해바라기의 이름을 지어 달라 부탁하기도 하고, 자라나는 모습을 사진 찍어 보내기도 합니다. 아마 그분은 뉴욕을 떠났으나 자라나는 해바라기와 더불어 마음 한 조각 뉴욕에 남겨뒀을지도 모릅니다. 


 좌선을 마친 아침이면 도량 앞을 비질하고 물 조리를 가득 채워 해바라기에 흩뿌려 줍니다. 이미 거름도 듬뿍 주었습니다. 변덕스런 뉴욕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봄기운을 따라 마디는 점점 굵어지고 잎사귀는 나날이 짙고 무성해져 갑니다. 벌써 몇 포기는 호기심 많은 새와 청솔모의 입질에 잘려나가 다시 뽑아내는 슬픔과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제 마음 속에 더 이상 원망은 자리하지 않습니다.     


 무뎌진 것일까요? 아니면 상처받기 싫어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나는 단지 정성을 기울일 뿐. 해바라기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엔 다른 생명이 움트겠지. 그 역시 그 나름의 꽃을 피우고 향을 낼 테지. 내가 원하는 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마음과, 싫은 결과라도 담담히 받아들이기를 연습합니다. 


 궂은 날씨와 해바라기를 맛있어라 채 자라나기도 전에 먹어 없애는 이웃생명을 미워하지 않고, 그 마저도 받아 안을 수 있는 마음만이, 수년전 해바라기를 피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주고 그 열매를 나누고자 했던 그 따스한 마음을 배신하지 않는 길이라는 걸 이제야 저는 알아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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